"진주정씨 우복종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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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글팀 진주정씨 우복종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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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상주시 의서면 우산리 193-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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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종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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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는 [[진주 정씨]] 우복 가문의 종택이다.
 
 
=='''정의'''==
 
진주정씨 우복가문의 종택이다.
 
  
 
=='''내용'''==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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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동천 좌측편 넓은 산등성의 중턱에 동향으로 앉아 있다. 1988년에 복원한 5칸 대문채 가운데 나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사랑채 · 안채 · 행랑채가 "튼 ㅁ"자를 이루면서 앉아있고 그 뒷편 오른쪽에 우복 정경세 선생을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앞쪽에 네벌대 석축을 쌓고 뒤로 조금 물린 곳에 다시 네벌대 기단을 축조하여 앉혔기 때문에 이색적으로 높다. 사랑채에서 대문채 너머 뛰어난 경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어 『산수헌』이라 했다. <ref>한국학자료센터 온라인 참조 '[http://archive.kostma.net/Family/T2/html/sub4_1.aspx?fid=B061a&clsA=01 우복종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상주 우산 진주정씨 산수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우산동천 좌측편 넓은 산등성의 중턱에 동향으로 앉아 있다. 1988년에 복원한 5칸 대문채 가운데 나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건너편에 사랑채 · 안채 · 행랑채가 "튼 ㅁ"자를 이루면서 앉아있고 그 뒷편 오른쪽에 우복 정경세 선생을 모신 불천위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앞쪽에 네벌대 석축을 쌓고 뒤로 조금 물린 곳에 다시 네벌대 기단을 축조하여 앉혔기 때문에 이색적으로 높다. 사랑채에서 대문채 너머 뛰어난 경관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어 『산수헌』이라 했다. <ref>한국학자료센터 온라인 참조 '[http://archive.kostma.net/Family/T2/html/sub4_1.aspx?fid=B061a&clsA=01 우복종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상주 우산 진주정씨 산수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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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와 우복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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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정씨]]와 우복가문===
우복종택은 조선 영조가 우복 정경세(1563~1633)선생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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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 우복종택|우복 종택]]은 [[조선 영조 | 영조]]가 [[정경세 | 우복 정경세(1563-1633)]]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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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 우복종택|우복 종택]]은 동향으로 지어졌다. 전체는 튼 ㅁ자 형태로 ㄱ 자형 안채와 ㅡ자 형 곁채가 ㄷ자 형으로, 그 앞쪽에 전면 5칸 측면 1칸의 사랑채가 배치되었다. 사당은 동쪽에 있다. 뒤쪽에 있는 대산루는 입재 정종로가 1700년 대 후반에 지어 대산루라고 이름붙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산루는 우리나라에서 개인 가옥에서 보기 드분 이층 건물이다. 누정건물로 2층은 흔하지만 2층에 온돌방을 들인 건물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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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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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종가의 상주 입향===
 
<!--===우복종가의 상주 입향===
 
우복가문이 진주의 세거지를 떠나 상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우복의 8대조 [[정의생(鄭義生)]] 때로서 시기적으로는 대략 1300년대 중반 경에 해당한다. 『晋州鄭氏族譜』와 『商山志』 등에 따르면 정의생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 정택(鄭擇)을 배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상주의 강력한 토착세력이던 商山金氏 김덕제(金德齊)의 딸과 혼인하게 되엇고 남부녀자혼의 관행에 따라 상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진주정씨 일문이 형성될 수 있었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정택의 사환에 따른 정의생의 혼맥이었다. 상주 진주정씨의 보첩류에서는 정택을 1世, 정의생을 2世로 기록하여 상주입향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정의생과 그의 자손들은 한동안 고관이나 석학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정의생과 아들 장효옹은 부사, 손자 정걸은 호군, 중손 정극공은 창신교위를 지내는 등 비록 중하급의 관직이나마 사환이 지속되었다. 이는 진주정씨가 처향에 입향한 이후 사회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우복가문이 진주의 세거지를 떠나 상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우복의 8대조 [[정의생(鄭義生)]] 때로서 시기적으로는 대략 1300년대 중반 경에 해당한다. 『晋州鄭氏族譜』와 『商山志』 등에 따르면 정의생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 정택(鄭擇)을 배행하는 과정에서 당시 상주의 강력한 토착세력이던 商山金氏 김덕제(金德齊)의 딸과 혼인하게 되엇고 남부녀자혼의 관행에 따라 상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진주정씨 일문이 형성될 수 있었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정택의 사환에 따른 정의생의 혼맥이었다. 상주 진주정씨의 보첩류에서는 정택을 1世, 정의생을 2世로 기록하여 상주입향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후 정의생과 그의 자손들은 한동안 고관이나 석학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정의생과 아들 장효옹은 부사, 손자 정걸은 호군, 중손 정극공은 창신교위를 지내는 등 비록 중하급의 관직이나마 사환이 지속되었다. 이는 진주정씨가 처향에 입향한 이후 사회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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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 종택은 1750년 전후에 정주원의 주도 하에 8대를 세거했던 율리를 떠나 우산이거를 단행하였다. 우산으로 이거한 일차적인 배경은 우산에 정경세가 마련한 전답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경세가 지은 서원이 있었는데 정경세와 그 자손들은 우산을 자주 왕래하며 이 곳 서실을 독서처로 이용해 왔다. 또한 영조가 정경세의 학덕과 종사에 미친 공적을 치하하여 우산 일대를 우복가문의 사패지로 내렸는데 그 토지의 규모가 동서로 2kxm 남북으로 4km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정주원은 산장 주변의 방대한 토지를 하사받으면서 우산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우복가문은 율리의 동종들과 떨어져 우산에서 새로이 종문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현재의 우복종택도 이 때 지어진 건물이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9-281쪽. </ref>
 
우복 종택은 1750년 전후에 정주원의 주도 하에 8대를 세거했던 율리를 떠나 우산이거를 단행하였다. 우산으로 이거한 일차적인 배경은 우산에 정경세가 마련한 전답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정경세가 지은 서원이 있었는데 정경세와 그 자손들은 우산을 자주 왕래하며 이 곳 서실을 독서처로 이용해 왔다. 또한 영조가 정경세의 학덕과 종사에 미친 공적을 치하하여 우산 일대를 우복가문의 사패지로 내렸는데 그 토지의 규모가 동서로 2kxm 남북으로 4km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정주원은 산장 주변의 방대한 토지를 하사받으면서 우산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우복가문은 율리의 동종들과 떨어져 우산에서 새로이 종문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현재의 우복종택도 이 때 지어진 건물이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9-281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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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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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의 후손인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노력하는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ref> 이 중 한글문서인 「[[연행만록]]」이 2016년 장서각에서 진행한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의 전적을 이 때 소실하게 되었으며 현대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으며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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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다.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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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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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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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비가의 학문과 벼슬 : 진주정씨 우복종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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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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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조선시대 양반가문 소장 曆書類의 현황과 가치」, 『史學硏究』 Vol.86, 한국사학화,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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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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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대,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64000 상주 우복종가]", 『경북일보』, 작성일: 2016년 07월 03일.
 +
*진용숙, "[http://www.kyongbuk.co.kr/main/news/news_content.php?id=530432&news_area=102&news_divide=10202&news_local=22&effect=4 名家를 찾아서 - 10. 진주 정씨 우복종택]", 『경북일보』, 작성일: 2011년 0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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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한글고문서]][[분류:문화유산]]
 
[[분류 : 한글고문서]][[분류:문화유산]]

2017년 11월 25일 (토) 02:18 기준 최신판

진주정씨 우복종택
(晋州鄭氏 偶伏宗宅)
한글팀 진주정씨 우복종택.JPG
대표명칭 진주정씨 우복종택
한자표기 晋州鄭氏 偶伏宗宅
유형 주택(한옥)
시대 조선
관련유물유적 연행만록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는 진주 정씨 우복 가문의 종택이다.

내용

진주 정씨와 우복가문

우복 종택 영조 우복 정경세(1563-1633)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우복 종택은 동향으로 지어졌다. 전체는 튼 ㅁ자 형태로 ㄱ 자형 안채와 ㅡ자 형 곁채가 ㄷ자 형으로, 그 앞쪽에 전면 5칸 측면 1칸의 사랑채가 배치되었다. 사당은 동쪽에 있다. 뒤쪽에 있는 대산루는 입재 정종로가 1700년 대 후반에 지어 대산루라고 이름붙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산루는 우리나라에서 개인 가옥에서 보기 드분 이층 건물이다. 누정건물로 2층은 흔하지만 2층에 온돌방을 들인 건물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1]


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정경세의 후손인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노력하는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2] 이 중 한글문서인 「연행만록」이 2016년 장서각에서 진행한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다.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진주정씨 우복종택 진주 정씨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진주정씨 우복종택 정경세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A ekc:isNamesakeOf B
연행만록 정경세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연행만록 진주정씨 우복종택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진주정씨 우복종택 정경세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A ekc:isNamesakeOf B

시간 정보

시간정보 내용
1300년대 정택정의생을 필두로 한 진주정씨 우복종가가 상주로 입향하였다.
1500년 전후 정번이 율리로 종택을 이건하였다
1750년 전후 정주원이 종가를 우산으로 이건하였다.
1946년 종택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문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갤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2.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3.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비가의 학문과 벼슬 : 진주정씨 우복종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4.
  • 논문
    • 정성희, 「조선시대 양반가문 소장 曆書類의 현황과 가치」, 『史學硏究』 Vol.86, 한국사학화, 2007.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