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이 요세에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요세를 부른 지눌의 편지)
잔글 (경전에서 진리를 깨닫다)
27번째 줄: 27번째 줄:
 
1182년 1월 개경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에서 도반들에게 결사의 뜻을 밝혔던 [[지눌]]은 얼마 후 홀로 입산수도의 길에 올랐다. 창평(전남 담양) 청원사에서 그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바로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만나고 확인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182년 1월 개경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에서 도반들에게 결사의 뜻을 밝혔던 [[지눌]]은 얼마 후 홀로 입산수도의 길에 올랐다. 창평(전남 담양) 청원사에서 그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바로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만나고 확인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185년 [[지눌]]은 다시 하가산(경북 예천) 보문사로 옮겨 대장경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선이 정말 불교가 맞는다면 선의 진리도 반드시 경전 속에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는 방대한 경전을 하나하나 훑어나갔다. 그렇게 경전 속에 지낸지 3년째 되던 해 ‘화엄경’과 이통현의 ‘화엄론’에서 지눌은 교(敎)에도 심즉불(心卽佛)의 진리가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게 이것은 단순한 문자적 확인이 아니라 오랜 번민 끝에 얻은 깨달음의 체험이었다. [[지눌]]은 감격에 겨워 경전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다
+
1185년 [[지눌]]은 다시 학가산(경북 예천) 보문사로 옮겨 대장경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선이 정말 불교가 맞는다면 선의 진리도 반드시 경전 속에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는 방대한 경전을 하나하나 훑어나갔다. 그렇게 경전 속에 지낸지 3년째 되던 해 ‘화엄경’과 이통현의 ‘화엄론’에서 지눌은 교(敎)에도 심즉불(心卽佛)의 진리가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게 이것은 단순한 문자적 확인이 아니라 오랜 번민 끝에 얻은 깨달음의 체험이었다. [[지눌]]은 감격에 겨워 경전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다
+
 
 
===정혜결사에 동행한 지눌과 요세===
 
===정혜결사에 동행한 지눌과 요세===
 
오래된 도반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옛날 약속했던 정혜결사를 실행하자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지눌]]은 그가 머무는 팔공산 거조사로 향했다. [[지눌]]은 그곳에서 결사의 깃대를 올리고 옛 도반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그 장문의 초청장이 『[[권수정혜결사문|정혜결사문]]』이었다.
 
오래된 도반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옛날 약속했던 정혜결사를 실행하자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지눌]]은 그가 머무는 팔공산 거조사로 향했다. [[지눌]]은 그곳에서 결사의 깃대를 올리고 옛 도반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그 장문의 초청장이 『[[권수정혜결사문|정혜결사문]]』이었다.

2017년 12월 28일 (목) 00:38 판

특별기고 목록
글: 이재형 기자(법보신문)

보조지눌이 원묘요세에게

Quote-left.png 파도가 어지러우면 달이 드러나기 어렵고, 방[室]이 깊어야 등불 더욱 빛나리. 권하노니 그대여 마음그릇을 가지런히 하오, 감로장(甘露獎)을 기울여 쏟지 말아야 하느니. Quote-right.png


순천 송광사 국사전 내 보조국사 지눌의 진영

1198년 봄, 개경 고봉사(高峯寺) 법회에 참석한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법이 강설되는 자리였건만 온통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지혜와 복덕을 닦아 중생을 구제해야겠다는 열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들 그저 명리와 이익을 얻기 위해 법회에 온 것 같았다. 요세는 그들을 향해 법을 설했다. 그의 말은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고,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치밀했다. 36살 요세의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요세를 부른 지눌의 편지

요세는 경남 의령지역인 신번현(新繁縣) 출신이다. 1163년 10월, 토착 세력가였던 서씨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2살에 천태종 사찰로 출가해 줄곧 천태의 교관을 익혀왔다. 23살 때 승과에 합격한 요세는 더욱 부지런히 정진했고 36살에는 이미 불경에 대한 안목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요세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장연사에서 법을 펼치고 있을 때였다. 지눌은 짧은 게송으로 요세에게 선수행을 권유하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선을 닦아야 내면의 불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요세지눌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불교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치고 지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8년 전(1190년)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했던 바로 그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요세는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라는 말로 시작하는 『정혜결사문』의 내용은 잘 알고 있었다.

정혜결사문』에는 어떠한 권위주의나 고정된 틀을 싫어하는 지눌의 성품이 선명히 나타났다. 경론과 조사의 어구를 종횡무진으로 인용하고 있는 해박함, 뜨거운 구도자의 열정과 날카로운 시대의식, 기필코 뜻을 이루겠다는 굳은 개혁의지가 유감없이 드러나 있었다.

요세는 곧바로 행장을 꾸려 그가 있다는 팔공산 거조사(居祖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눌요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곳에는 선문(禪門)이나 교종(敎宗)은 물론 유교나 도교 계통의 사람들도 있었다. 탐욕이 득실거리는 세상을 벗어나 서로 절차탁마해가며 정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경전을 읽고 선정을 닦았으며, 예불을 드리고 울력도 했다.

요세는 결사에 동참한 지 오래지 않아 지눌이 대단한 인물임을 새삼 깨달았다. 지눌은 자신을 ‘소치는 사람’이란 뜻을 지닌 목우자(牧牛子)라 지칭했다. 검은 소를 길들이는 동자처럼 지눌은 쉼 없이 마음을 닦아나갔다.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계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경전에서 진리를 깨닫다

지눌은 1158년 황해도 서흥의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손에 이끌려 8살에 선종사찰로 출가한 그는 결코 문중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고 오직 진리만을 따르고자 했다. 지눌은 전국 각지의 사찰을 찾아 정진하는 과정에서 승려들이 정치싸움에 휘말려 출가자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는 일들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모순에 찬 불교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출가정신으로 돌아가 수행에 전념하자는 혁신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정혜결사였다.

1182년 1월 개경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에서 도반들에게 결사의 뜻을 밝혔던 지눌은 얼마 후 홀로 입산수도의 길에 올랐다. 창평(전남 담양) 청원사에서 그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여자성(眞如自性)은 바로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만나고 확인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185년 지눌은 다시 학가산(경북 예천) 보문사로 옮겨 대장경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선이 정말 불교가 맞는다면 선의 진리도 반드시 경전 속에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는 방대한 경전을 하나하나 훑어나갔다. 그렇게 경전 속에 지낸지 3년째 되던 해 ‘화엄경’과 이통현의 ‘화엄론’에서 지눌은 교(敎)에도 심즉불(心卽佛)의 진리가 있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게 이것은 단순한 문자적 확인이 아니라 오랜 번민 끝에 얻은 깨달음의 체험이었다. 지눌은 감격에 겨워 경전을 머리에 이고 눈물을 흘렸다

정혜결사에 동행한 지눌과 요세

오래된 도반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옛날 약속했던 정혜결사를 실행하자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지눌은 그가 머무는 팔공산 거조사로 향했다. 지눌은 그곳에서 결사의 깃대를 올리고 옛 도반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그 장문의 초청장이 『정혜결사문』이었다.

3~4명의 도반들로 시작된 결사는 점차 거조사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확대됐다. 지눌은 새로운 도량을 물색했고 송광산 길상사로 눈길을 돌렸다.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있을 뿐 아니라 거센 민란이 비켜가는 자리이기도 했다. 1197년 길상사 확장공사가 진행되면서 결사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이 때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했다.

천태종 요세가 정혜결사에 합류한 것도 지눌이 거조사를 떠날 즈음이었다. 결사의 취지에 깊이 공감했던 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히 결사에 참여해 정진했다. 잠잘 때 깔개조차 사용하지 않았으며, 누군가 시주하는 물건이 있으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요세지눌과도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대부분 뜻이 맞았지만 간혹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도 있었다. 정토가 주제가 될 때면 더욱 그랬다. 때때로 요세에게 지눌이 내세운 정혜는 특출난 근기를 소유한 사람에게나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시억겁의 생사윤회에서 허덕이는 나약한 중생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의 내부에서는 무력한 범부도 실천이 가능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천태사상에 다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에서 대중을 이끌다

그 무렵 지눌에게는 또 한 번의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상무주암에서 송나라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어록을 보면서 ‘가슴에 걸려 있던’ 마지막 하나까지 완벽히 없앨 수 있었다. 원수처럼 그를 괴롭히던 알음알이의 병, 언어와 개념을 매개로 하지 않은 선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2년 뒤인 1200년 지눌요세와 더불어 상무주암을 떠나 송광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요세에게도 기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원 귀정사 주지의 요청으로 그는 천태지의 저술을 해설한 ‘묘종’을 강의했다. 이를 계기로 요세지눌과 결별의 길을 걸었다. 특히 1208년 영암 월출산 약사난야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수행관을 조계선에서 천태교관으로 완전히 전환했다.

요세는 대중들과 참선을 하는 틈틈이 매일 준제진언 1천 번과 나무아미타불 명호 1만 번 외웠다. 맹렬한 참회행도 닦아 날마다 53불(佛)을 12번이나 돌며 한 분 한 분에게 절을 올렸다.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요세가 예경을 거르는 일은 없었다. 선을 닦는 이들 사이에서 그는 ‘서참회’로 불리기 시작했다. 요세는 근기가 낮은 범부, 즉 민중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겠다고 눈물로 발원했다.

그 뒤 요세는 만덕산로 거처를 옮겨 1216년 마침내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개창했다. 요세는 백련사에서 경전을 독송하고 배포하면 정토왕생할 수 있다고 적극 권장했다. 또 부처님의 자비로운 호념(護念)을 힘입지 않으면 안 된다며 자신의 두터운 죄장부터 참회할 것을 권했다.

백련결사에는 지식인층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결사에 속속 참여했다. 이후 요세에게서 득도한 제자가 38명, 개창한 가람이 5개소, 직접 백련사에서 결사에 참여한 이가 300여명에 이르렀다. 멀리 인연을 맺은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245년 7월3일 요세는 “모든 법의 본체는 청정하고 맑다. 말하는 자는 이치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들어 보이는 자는 종지(宗旨)를 어긴다”는 말을 남기고 원효의 '미타징성가'를 부르며 정토로 떠났다.

앞서 지눌수선사(修禪社)에서 대중들을 이끌었다. 촌음을 아껴가며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등 집필을 통해 정혜결사와 돈오점수론의 이론적 체계를 세웠다. 호랑이 눈처럼 날카로운 통찰력과 소걸음의 성실함을 갖췄던 호시우행(牛行虎視)의 수행자 지눌. 1210년 3월27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다가 법상(法床)에 앉아 열반에 들었다.

보조국사 지눌원묘국사 요세에게 보낸 편지는 『동문선(東文選)』(권 117)의 「만덕산백련사원묘국사비명병서(萬德山白連社圓妙國師碑銘)」에 전한다.

같이보기

주석

  1. 사진출처:조용길, "권수정혜결사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길희성, 『지눌의 선사상』, 소나무, 2001.
  • 보조국사 열반 800주년 기념사업회, 『보조국사의 생애와 사상』, 불일출판사, 2011.
  • 김성순, 『동아시아 염불결사의 연구』, 비움과 소통, 2014.
  • 최병헌, 「정혜결사문의 취지와 창립과정」, 『보조사상』 5·6합집, 보조사상연구원, 1992.
  • 고익진, 「원묘요세의 백련결사와 그 사상적 동기」, 『불교학보』 15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1978.
  • 변동명, 「원묘국사 요세의 정혜결사 참여와 결별」, 『역사학보』 제156집, 역사학회, 1997.
  • 채상식, 「고려후기 원묘요세의 백련결사」, 『정토학연구』 제3집, 한국정토학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