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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에 참여===
 
===조선 건국에 참여===
1391년 [[조선 태조]]가 낙상을 당하였는데, [[정몽주]]가 [[조준]], [[정도전]], [[남은]], [[조박]], [[윤소종]], [[남재]] 등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시묘살이 하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조선 태종]]은 [[[벽란도]]에 유숙하고 있었던 [[조선 태조]]를 찾아가 빨리 성 안으로 들어가도록 재촉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정도전]], [[조준]] 등의 죄를 묻는 탄핵 상소는 [[조선 태조]]를 조준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태종]]은 머뭇거리는 태조를 대신하여, [[조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 자기 휘하의 인사를 동원하여 [[정몽주]]를 그의 집 동구에서 살해하였다. 이는 이성계 세력의 마지막 위기이자 개국의 걸림돌을 해결한 것이었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백관들의 추대와 왕대비의 교지, [[고려 공양왕]]의 선위라는 형식 속에서 왕좌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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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년 [[조선 태조]]가 낙상을 당하였는데, [[정몽주]]가 [[조준]], [[정도전]], [[남은]], [[조박]], [[윤소종]], [[남재]] 등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시묘살이 하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조선 태종]]은 [[[벽란도]]에 유숙하고 있었던 [[조선 태조]]를 찾아가 빨리 성 안으로 들어가도록 재촉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정도전]], [[조준]] 등의 죄를 묻는 탄핵 상소는 [[조선 태조]]를 조준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태종]]은 머뭇거리는 태조를 대신하여, [[조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 자기 휘하의 인사를 동원하여 [[정몽주]]를 그의 집 동구에서 살해하였다. 이는 이성계 세력의 마지막 위기이자 개국의 걸림돌을 해결한 것이었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백관들의 추대와 왕대비의 교지, [[고려 공양왕]]의 선위라는 형식 속에서 왕좌에 즉위하였다.  <ref>이광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1 태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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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조선이 개국된 후 [[조선 태종]]은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다.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새로운 권력 구조에서는 배제되었다. 왕실과 종친을 배제하는 속에서 군권에서도 제외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에도 책립될 수 없었다. 또한 세자로 책봉되지도 못하였다. 1398년 진도(陣圖) 연습과 요동 정벌을 계기로 휘하의 사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고 [[조선 태조]]가 병석에 눕자, 8월 26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과 세자인 [[이방석]], 그 형인 [[이방번]] 등을 일거에 제거하는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를 계기로 일거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세자 추대를 사양하고, 장자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형인 [[조선 정종|영안군(永安君)]]을 세자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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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개국된 후 [[조선 태종]]은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다.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새로운 권력 구조에서는 배제되었다. 왕실과 종친을 배제하는 속에서 군권에서도 제외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에도 책립될 수 없었다. 또한 세자로 책봉되지도 못하였다. 1398년 진도(陣圖) 연습과 요동 정벌을 계기로 휘하의 사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고 [[조선 태조]]가 병석에 눕자, 8월 26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과 세자인 [[이방석]], 그 형인 [[이방번]] 등을 일거에 제거하는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를 계기로 일거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세자 추대를 사양하고, 장자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형인 [[조선 정종|영안군(永安君)]]을 세자로 세웠다. <ref>이광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1 태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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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
 
[[조선 정종]]은 자식이 많기는 하였으나, 적처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1400년(정종 2) 초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조선 태종]]이 세자로 책봉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노린 [[회안군 이방간]]과 [[조선
 
[[조선 정종]]은 자식이 많기는 하였으나, 적처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1400년(정종 2) 초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조선 태종]]이 세자로 책봉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노린 [[회안군 이방간]]과 [[조선
  태종]] 사이의 대결이었다. 이들은 개성 시내의 남산(자남산이라고도 함)에서 [[선죽교]]에 이르는 일대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결국 [[조선 태종]]이 승리하였다.  2월 1일에 [[하윤]]의 주청에 따라 [[조선 태종]]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약 9개월 후 [[조선 정종]]은 [[조선 태종]]에게 선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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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사이의 대결이었다. 이들은 개성 시내의 남산(자남산이라고도 함)에서 [[선죽교]]에 이르는 일대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결국 [[조선 태종]]이 승리하였다.  2월 1일에 [[하윤]]의 주청에 따라 [[조선 태종]]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약 9개월 후 [[조선 정종]]은 [[조선 태종]]에게 선위하였다. <ref>이광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1 태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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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의 관계 정립===
 
===명과의 관계 정립===
조선 건국 후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명과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조선 태종]]은 즉위 후 얼마되지 않은 1401년(태종 1)에 [[명 건문제]]로부터 국왕으로 책봉받는 고명과 인신을 받았으며,  [[명 영락제]]가 [[명 건문제]]를 몰아낸 후에는 [[명 영락제]]로부터 다시 책봉을 받았다. 이로써 조선은 서적·약재·역서 등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나라의 기강을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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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후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명과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조선 태종]]은 즉위 후 얼마되지 않은 1401년(태종 1)에 [[명 건문제]]로부터 국왕으로 책봉받는 고명과 인신을 받았으며,  [[명 영락제]]가 [[명 건문제]]를 몰아낸 후에는 [[명 영락제]]로부터 다시 책봉을 받았다. 이로써 조선은 서적·약재·역서 등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나라의 기강을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ref>이광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1 태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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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의 정비 : 육조직계제의 실시===
 
===관제의 정비 : 육조직계제의 실시===
[[조선 태종]]은 즉위 전 관제 개정을 통해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립한 데 이어, 1401년(태종 1)에는 문하부(門下府)를 혁파하여 이를 의정부에 귀속시키고, 그 때까지 의정부합좌에 참여했던 삼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삼군총제를 제외하였다. 이로써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여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다시금 이를 개정하여 육조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외에도 육조의 각 조마다 세 개의 속사(屬司)를 설치하고, [[의정부]]·[[사헌부]]·[[사간원]]·[[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계문하도록 함으로써,  상세정보  왕-의정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해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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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은 즉위 전 관제 개정을 통해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립한 데 이어, 1401년(태종 1)에는 문하부(門下府)를 혁파하여 이를 의정부에 귀속시키고, 그 때까지 의정부합좌에 참여했던 삼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삼군총제를 제외하였다. 이로써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여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다시금 이를 개정하여 육조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외에도 육조의 각 조마다 세 개의 속사(屬司)를 설치하고, [[의정부]]·[[사헌부]]·[[사간원]]·[[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계문하도록 함으로써,  상세정보  왕-의정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해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ref>이광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1 태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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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재건설 : 창덕궁===
 
===한성 재건설 : 창덕궁===
[[조선 정종]]은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으로 되돌아갔다. [[조선 태종]]은 즉위 후 부왕인 [[조선 태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를 위한 가장 큰 당면과제로 대두된 것이 한성으로 재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대에도 한성 재천도는 쉽지 않아서 4년여의 진통 기간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1404년 천도를 결정하고 1405년 이를 실행하였다. 천도를 결정한 후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이궁을 건설하고 이곳에 입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창덕궁]]이다. 또한 개천(청계천)을 준설하고 시전 행랑을 건설하였다. [[경복궁]]에 [[경복궁 경회루|경회루]]를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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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종]]은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으로 되돌아갔다. [[조선 태종]]은 즉위 후 부왕인 [[조선 태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를 위한 가장 큰 당면과제로 대두된 것이 한성으로 재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대에도 한성 재천도는 쉽지 않아서 4년여의 진통 기간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1404년 천도를 결정하고 1405년 이를 실행하였다. 천도를 결정한 후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이궁을 건설하고 이곳에 입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창덕궁]]이다. 또한 개천(청계천)을 준설하고 시전 행랑을 건설하였다. [[경복궁]]에 [[경복궁 경회루|경회루]]를 새로 지었다. <ref>이광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1 태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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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국가의례 정비===
 
===불교와 국가의례 정비===
1405년(태종 5) 한양 천도 후 대대적인 불교 개혁에 착수하였다. 국가가 지정한 사원 이외의 사원전(寺院田)과 노비를 환수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불교를 7개의 종파로 축소시켰으며, 1415년에는 [[연등회]]를 폐지하였다.  한편 국가 의례도 정비되었다. 등급별 세세한 규정들이 마련되기 시작하였고 이가 일부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 등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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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년(태종 5) 한양 천도 후 대대적인 불교 개혁에 착수하였다. 국가가 지정한 사원 이외의 사원전(寺院田)과 노비를 환수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불교를 7개의 종파로 축소시켰으며, 1415년에는 [[연등회]]를 폐지하였다.  한편 국가 의례도 정비되었다. 등급별 세세한 규정들이 마련되기 시작하였고 이가 일부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 등으로 계승되었다. <ref>이광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1 태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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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제도 개편===
 
===토지제도 개편===
태종대에는 양전사업을 통해 국가적으로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보하였다. 면세전을 축소하고 과전의 결수를 줄임으로써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대하였다. 1409년에는 과전법(科田法)을 개정해, 세를 물지 않았던 사원· 공신전(功臣田)을 유세지로 편입시켰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으며, 1414년에는 수신전· 휼양전의 지급 액수를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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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에는 양전사업을 통해 국가적으로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보하였다. 면세전을 축소하고 과전의 결수를 줄임으로써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대하였다. 1409년에는 과전법(科田法)을 개정해, 세를 물지 않았던 사원· 공신전(功臣田)을 유세지로 편입시켰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으며, 1414년에는 수신전· 휼양전의 지급 액수를 줄였다.<ref>이광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101 태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9월 16일 (토) 23:41 판

태종(太宗)
대표명칭 태종
한자표기 太宗
생몰년 1367-1422
본관 전주
이칭 이방원
시호 공정예철성렬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恭定睿哲成烈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유덕(遺德)
사망지 경복궁 근정전
시대 조선
대표직함
배우자 원경왕후 민씨
조선 태조
신의왕후 한씨
자녀 정순공주,경정공주, 경안공주,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정선공주, 성녕대군 이종
전임자 조선 정종
후임자 조선 세종
능묘 헌릉



정의

태종은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은 1400~1418년이다. 이름은 방원(芳遠)이다. 자는 유덕(遺德)이며, ‘태종(太宗)’은 묘호(廟號)이다.

내용

출생과 성장

조선 태종은 본명이 이방원(李芳遠), 자(字)는 유덕(遺德)이다. 1367년(공민왕 16) 5월 16일 신묘일에 함흥부(咸興府) 귀주(歸州)에서 태조 이성계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은 138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같이 급제한 김한로는 후일 양녕대군 이제의 장인이 된다. 야사에서는 신덕왕후 강씨조선 태종의 영특함을 부러워하였으며, 태조는 태종의 과거 급제 당시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며, 문한을 담당하는 제학(提學)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그 임명장을 소리 내어 몇 번씩 읽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태조가 문신들을 초청할 때면 시를 짓는 등의 일을 담당함으로써 교유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등 무장 출신인 태조가 할 수 없었던 영역을 태종이 보완할 수 있었다. [1]

조선 건국에 참여

1391년 조선 태조가 낙상을 당하였는데, 정몽주조준, 정도전, 남은, 조박, 윤소종, 남재 등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시묘살이 하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들은 조선 태종은 [[[벽란도]]에 유숙하고 있었던 조선 태조를 찾아가 빨리 성 안으로 들어가도록 재촉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정도전, 조준 등의 죄를 묻는 탄핵 상소는 조선 태조를 조준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 태종은 머뭇거리는 태조를 대신하여, 조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 자기 휘하의 인사를 동원하여 정몽주를 그의 집 동구에서 살해하였다. 이는 이성계 세력의 마지막 위기이자 개국의 걸림돌을 해결한 것이었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백관들의 추대와 왕대비의 교지, 고려 공양왕의 선위라는 형식 속에서 왕좌에 즉위하였다. [2]

제1차 왕자의 난

조선이 개국된 후 조선 태종은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다.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새로운 권력 구조에서는 배제되었다. 왕실과 종친을 배제하는 속에서 군권에서도 제외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에도 책립될 수 없었다. 또한 세자로 책봉되지도 못하였다. 1398년 진도(陣圖) 연습과 요동 정벌을 계기로 휘하의 사병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고 조선 태조가 병석에 눕자, 8월 26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과 세자인 이방석, 그 형인 이방번 등을 일거에 제거하는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를 계기로 일거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세자 추대를 사양하고, 장자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형인 영안군(永安君)을 세자로 세웠다. [3]

제2차 왕자의 난

조선 정종은 자식이 많기는 하였으나, 적처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1400년(정종 2) 초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조선 태종이 세자로 책봉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노린 회안군 이방간과 [[조선

태종]] 사이의 대결이었다. 이들은 개성 시내의 남산(자남산이라고도 함)에서 선죽교에 이르는 일대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결국 조선 태종이 승리하였다.  2월 1일에 하윤의 주청에 따라 조선 태종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약 9개월 후 조선 정종조선 태종에게 선위하였다. [4]

명과의 관계 정립

조선 건국 후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명과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조선 태종은 즉위 후 얼마되지 않은 1401년(태종 1)에 명 건문제로부터 국왕으로 책봉받는 고명과 인신을 받았으며, 명 영락제명 건문제를 몰아낸 후에는 명 영락제로부터 다시 책봉을 받았다. 이로써 조선은 서적·약재·역서 등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나라의 기강을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5]

관제의 정비 : 육조직계제의 실시

조선 태종은 즉위 전 관제 개정을 통해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립한 데 이어, 1401년(태종 1)에는 문하부(門下府)를 혁파하여 이를 의정부에 귀속시키고, 그 때까지 의정부합좌에 참여했던 삼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삼군총제를 제외하였다. 이로써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여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다시금 이를 개정하여 육조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외에도 육조의 각 조마다 세 개의 속사(屬司)를 설치하고, 의정부·사헌부·사간원·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계문하도록 함으로써, 상세정보 왕-의정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해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6]


한성 재건설 : 창덕궁

조선 정종은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으로 되돌아갔다. 조선 태종은 즉위 후 부왕인 조선 태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를 위한 가장 큰 당면과제로 대두된 것이 한성으로 재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대에도 한성 재천도는 쉽지 않아서 4년여의 진통 기간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1404년 천도를 결정하고 1405년 이를 실행하였다. 천도를 결정한 후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이궁을 건설하고 이곳에 입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창덕궁이다. 또한 개천(청계천)을 준설하고 시전 행랑을 건설하였다. 경복궁경회루를 새로 지었다. [7]

불교와 국가의례 정비

1405년(태종 5) 한양 천도 후 대대적인 불교 개혁에 착수하였다. 국가가 지정한 사원 이외의 사원전(寺院田)과 노비를 환수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불교를 7개의 종파로 축소시켰으며, 1415년에는 연등회를 폐지하였다. 한편 국가 의례도 정비되었다. 등급별 세세한 규정들이 마련되기 시작하였고 이가 일부 수정을 거쳐 국조오례의 등으로 계승되었다. [8]

토지제도 개편

태종대에는 양전사업을 통해 국가적으로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보하였다. 면세전을 축소하고 과전의 결수를 줄임으로써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대하였다. 1409년에는 과전법(科田法)을 개정해, 세를 물지 않았던 사원· 공신전(功臣田)을 유세지로 편입시켰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으며, 1414년에는 수신전· 휼양전의 지급 액수를 줄였다.[9]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선 세종 조선 태종 A는 아버지 B가 있다
조선 세종 원경왕후 A는 어머니 B가 있다
조선 태종 원경왕후 A는 B의 남편이다
조선 세종 정소공주 A는 딸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정의공주 A는 딸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조선 문종 A는 아들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조선 세조 A는 아들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안평대군 A는 아들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임영대군 A는 아들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광평대군 A는 아들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금성대군 A는 아들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평원대군 A는 아들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영응대군 A는 아들 B를 두었다
조선 세종 소헌왕후 A는 B의 남편이다
소헌왕후 심온 A는 아버지 B가 있다
집현전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훈민정음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창시되었다 1443년
조선 세종 용비어천가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용비어천가 편찬 용비어천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운회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운회 편찬 훈민정음 A는 B와 관련이 있다
운회 편찬 운회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삼강행실도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삼강행실도 편찬 훈민정음 A는 B와 관련이 있다
삼강행실도 편찬 삼강행실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동국정운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동국정운 편찬 훈민정음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동국정운 편찬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홍무정운역훈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홍무정운역훈 편찬 훈민정음 A는 B와 관련이 있다
홍무정운역훈 편찬 홍무정운역훈 A는 B와 관련이 있다
집현전 세종실록오례 편찬 A는 B를 주도하였다
세종실록오례 편찬 세종실록오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국조오례의 세종실록오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정대업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보태평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봉래의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조선 세종 율관·편경·편종 제작 A는 B를 명령하였다
박연 율관·편경·편종 제작 A는 B를 주도하였다
율관·편경·편종 제작 율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율관·편경·편종 제작 편경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율관·편경·편종 제작 편종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율관 박연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편경 박연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편종 박연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정간보 조선 세종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조선 세종 신속육전등록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1422년
신속육전등록 편찬 신속육전등록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신찬경제속육전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1433년
신찬경제속육전 편찬 신찬경제속육전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육전등록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1433년
육전등록 편찬 육전등록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혼천의 제작 A는 B를 명령하였다 1432년
혼천의 제작 혼천의 A는 B와 관련이 있다
혼천의 장영실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혼천의 이천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조선 세종 자격루 제작 A는 B를 명령하였다 1434년
자격루 제작 자격루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측우기 제작 A는 B를 명령하였다 1441년
측우기 제작 측우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칠정산내외편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1442년
칠정산내외편 편찬 칠정산내외편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제가역상집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1445년
제가역상집 편찬 제가역상집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농사직설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1429년
농사직설 편찬 농사직설 A는 B와 관련이 있다
정초 농사직설 편찬 A는 B를 주도하였다 1429년
조선 세종 갑인자 제작 A는 B를 명령하였다 1420년
조선 세종 경자자 제작 A는 B를 명령하였다 1434년
조선 세종 병진자 제작 A는 B를 명령하였다 1436년
조선 세종 총통등록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1448년
조선 세종 공법의 시행 A는 B를 명령하였다 1443년
공법의 시행 공법 A는 B와 관련이 있다
조선 세종 4군6진 개척 A는 B를 명령하였다
김종서 4군6진 개척 A는 B를 주도하였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08년 조선 세종소헌왕후와 혼인하였다.
1408년 조선 세종이 충녕군에 봉해졌다.
1412년 조선 세종이 충녕대군에 봉해졌다.
1418년 조선 세종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1418년 조선 세종이 즉위하였다.
1420년 조선 세종집현전을 설립하였다.
1420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경자자가 제작되었다.
1422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신속육전등록이 편찬되었다.
1429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농사직설이 편찬되었다.
1431년 조선 세종향약집성방 편찬을 명령하였다.
1432년 조선 세종혼천의 제작을 명령하였다.
1433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신찬경제속육전이 편찬되었다.
1433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육전등록을 편찬되었다.
1433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향약집성방이 편찬되었다.
1434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자격루가 제작되었다.
1434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갑인자가 제작되었다.
1436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병진자가 제작되었다.
1436년 조선 세종공법의 시행을 명령하였다.
1438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혼천의가 제작되었다.
1441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측우기가 제작되었다.
1442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칠정산내외편가 편찬되었다.
1443년 조선 세종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1445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제가역상집이 편찬되었다.
1445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의방유취가 편찬되었다.
1446년 조선 세종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1448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총통등록이 편찬되었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9. 이광렬, "태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박현모, 『세종의 서제』, 서해문집, 2016.
    • 김슬옹, 『세종, 한글로 세상을 바꾸다 : 소통과 어울림의 글자 한글 이야기』, 창비, 2013.
    • 지두환, 『세종대왕과ㅏ 친인척』, 역사문화, 2011.
    • 정윤재, 『(청소년을 위한)세종 리더십 이야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0.
  • 논문
    • 송방송, 「세종의 음악 정치 목적과 방법 고찰」, 『동양예술』20, , 한국동양예술학회, 2012.
    • 김종명, 「세종의 불교관과 유교 정치」, 『불교학연구』25, ,불교학연구회, 2010.
    • 차문섭, 「세종대의 국방과 외교」, 『세종학연구』12·13,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 박병호, 「법제면에서 본 세종조 문화의 재조명」, 『세종학연구』8,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3.
    • 박성래, 「세종대 과학 발달의 뜻과 그 계승」, 『세종학연구』8,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3.
    • 오기수, 「세종대왕의 조세사상과 공법(貢法) 연구 -조세법 측면에서- 」, 『세무학연구』28, , 한국세무학회, 2011.
    • 정달영, 「세종시대의 어문정책과 훈민정음 창제 목적」, 『한민족문화연구』22, , 한민족문화학회, 2007.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