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관이 사명당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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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형 기자(법보신문)

조선 정관이 사명당에게

Quote-left.png 아아, 불법이 쇠하고 세상도 극히 어지럽습니다. 듣건대 지금 왜적은 물러갔고 큰 공은 이미 이루었으므로 대궐에 나아가 사퇴를 청하기보다는 그냥 떠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원컨대 군복 대신 납의(衲衣)를 다시 걸치고 깊은 산에 들어가 종적을 감추소서. 그리하여 시냇물을 움켜 마시고 비름을 삶아 먹으면서 선정의 물을 다시 맑히고 지혜로운 달을 다시 밝혀서 반야의 자비로운 배에 올라 곧장 보리를 얻으시길 축원하고 축원합니다. Quote-right.png


산사에서 내려와 무기를 들다

임진년(1592년) 4월 시작된 왜란은 전 국토를 피로 물들였다. 수십만 명이 전란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시신들은 거리에 나뒹굴었다. 자식 잃은 부모, 부모 잃은 자식의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용케 살아남은 이들도 굶주림과 질병으로 다음 날을 기약하기 어려웠다. 지상에 펼쳐진 참혹한 세상은 차라리 지옥도에 가까웠다.

왜란은 불교계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몸을 피한 선조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휴정은 자신이 직접 통솔해 싸움터에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감동한 선조는 그 자리에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휴정은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을 보내 승려들이 누란의 위기를 맞은 나라를 지키는 데 적극 나설 것을 호소했다. 이에 각지에서 승병이 조직됐고, 그들은 목탁과 죽비 대신 칼과 창을 움켜쥐었다. 금강산 건봉사에 머물던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도 늙은 스승의 뜻에 기꺼이 동참했다. 비록 불교가 ‘불살생’을 첫째 계율로 내세우지만 무고한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 홀로 산사에 편안히 머무를 수는 없었다. 유정은 승려들에게 말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원래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왜적들이 흉한 무기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일이 곧 자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영웅이 된 유정

유정은 왜적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행패를 부릴 때 왜장과의 필담으로 불교의 자비를 설해 철병토록 했으며, 그 덕에 영동의 9개 군도 무사할 수 있었다. 휴정 휘하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임명된 유정은 2,000명의 승군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펼쳤다. 평양과 중화를 오고가는 적을 공격해 보급로를 차단했다. 파죽지세의 왜군 앞에 전의를 상실했던 관군과 의병들도 승군의 활약에 사기가 크게 진작됐다. 몇 달 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에도 유정은 산을 잘 타는 승병들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을 탈환하자 유정은 다시 권율과 함께 영남에 내려가 큰 전공을 세웠으며, 장기전에 대비해 병량과 병기 준비에 온힘을 기울였다.

학식과 인품, 거기에 담대함까지 갖춘 유정권율, 이순신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유정은 7년 전쟁 동안 전투와 평화협상이라는 두 축을 오고가며 때로는 장수로서 때로는 외교가로서 활약했다. 선조는 이런 유정에게 “환속한다면 100리를 다스릴 책임을 맡길 것이요, 3군을 통솔할 장수가 되게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유정선조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승려였고, 다만 전쟁이 자신을 싸움터에 머물도록 했을 뿐이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와 갈등

1598년 전쟁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그해 11월 왜적이 모두 물러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 7년 만에 막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엄청났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통에 죽거나 일본에 끌려갔다. 깊은 절망과 상실감…. 그렇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견뎌내야 했다.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괭이와 호미를 움켜쥐도록 했다.

왜란의 상처는 불교계라고 다르지 않아 심각한 후유증을 불러왔다. 싸움터로 나간 승군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둘 환속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갓 출가한 사미부터 수십 년간 절밥을 먹은 승려들까지 법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지계의식은 희박해졌고, 이를 바로 잡을 유능한 지도자도 찾기 어려웠다.

휴정의 상수제자인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15살에 출가해 선과 교학을 함께 닦던 정관은 나중에 휴정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은 선승이었다. 임진왜란은 그가 60살 되던 해에 일어났다. 스승 휴정이 승군으로 참여할 것을 호소할 때 정관은 직접 종군하지 않고 산중수행과 기도에 전념했다.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가는 전쟁의 참화가 더 없이 비통했지만 정관은 직접 칼을 들고 적과 마주해 싸우는 것이 승려의 본분이라 여기지 않았다. 수도와 기도를 통해 백성을 위로하고 선풍(禪風)을 유지하는 것도 불살생계를 지켜야하는 불교수행자의 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승려들이 전장에 적극 뛰어들면서 묵묵히 진리의 길을 걷는 일은 가볍게 여기는 풍토가 확산됐다.

정관은 사제인 유정이 여느 승려들과 다름을 익히 알았다. 그가 돌아오면 잘못된 불교계의 흐름도 크게 바뀔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동시에 정관유정이 차돌 같은 마음과 송죽 같은 절개를 지녔더라도 오래 머물다보면 명리에 물들지 않을까 우려했다. 게다가 혹여 유정이 바른 소리를 하다가 누명이나 오해를 받아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산사로 돌아오마던 유정의 편지

전쟁이 끝나고 얼마 뒤 정관유정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당시 유정은 조정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남방 해역에 성을 쌓고 승병을 동원할 수 있는 실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유정은 편지에서 자신의 안부를 간곡히 묻고 있었다. 또 대궐에 나아가 사퇴를 청한 뒤 승려의 본분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얘기도 적었다.

정관은 기뻤다. 유정이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음과 다시 산중으로 돌아오려 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다음 날 정관은 긴 답장을 썼다. 승려들이 전쟁터에 나간 후 환속하는 일이 많아졌고, 출가의 본뜻을 잊고 계행을 폐하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음도 알렸다. 또 이왕 군복을 벗고 납의를 입기로 결심했으면 조정에 아뢰지 않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도 전했다. 그러고는 가난을 벗 삼아 선정의 물을 맑히고 지혜의 달을 밝히기를 간곡히 축원했다.

임진왜란의 시작부터 전장을 누벼야 했던 유정. 정관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는 산사를 잊은 적이 없었다. 또 왜군의 총칼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과감히 칼을 들었지만 그 살생의 업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중생을 위해 가시밭길을 택하다

1604년 2월, 유정이 스승 휴정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묘향산으로 향할 때였다. 유정은 곧바로 입궐하라는 조정의 연락을 받았다. 스승의 마지막조차 지킬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 스승의 뜻임을 알았기에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선조는 그런 유정에게 비공식 정탐 사절단을 맡아 일본에 다녀올 것을 요청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에 그 많은 사대부들이 꺼려했지만 유정은 주저치 않고 선조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해 8월, 유정은 환갑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부산 다대포를 떠나 일본 대마도로 향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정관은 안타까웠다. 그는 ‘관음기도문’을 작성해 유정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송운(유정) 스님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주시어 적의 소굴을 벗어나게 하시고, 두려움이 없는 위엄에 의지해 조속히 오랑캐 땅에서 돌아오게 하소서. 빨리 배를 타고 순풍에 돛을 달아 고래 같은 파도를 헤치며, 가벼운 노를 빨리 저어 눈 깜짝할 새에 이쪽 언덕에 이르게 하옵소서.”

유정은 일본 본토에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통해 일본과의 화의(和議)를 이끌어냈다. 특히 이에야스와 담판을 지어 임진왜란 때 붙잡혀간 조선인 3,000여명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유정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을 떠난 지 10개월 뒤인 1605년 5월, 정관의 기도대로 무사히 돌아온 유정은 다음해 정월 스승 휴정의 사리탑을 세웠다.

하지만 전란은 유정의 몸 구석구석에 깊은 병을 심어놓았다. 1609년 2월 유정해인사 홍제암에서 “(지수화풍)네 가지 요소로 된 이 몸은 이제 장차 참(眞)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남기고 적멸에 들었다. 허균은 중생을 위해 어떤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유정을 위해 ‘널리 중생을 제도했다’는 의미를 담아 ‘홍제존자(弘濟尊者)’라 추존했다.

평생 호법(護法)의 삶의 살았던 정관이 호국(護國)을 길을 걸었던 유정에게 보낸 편지는 『정관집(靜觀集)』에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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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사명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당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 신유한 엮음, 이상현 옮김, 『송운대사분충서난록』, 동국대학교출판부, 2015.
  • 일선 지음, 배규범 옮김, 『정관집』,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 조영록, 『사명당평전』, 한길사, 2009.
  •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박노자), 「삼국, 통일신라, 고려의 승병사를 통해본 사명대사 의거의 의의와 인간적·종교적 비극성」, 『불교연구』 17집, 한국불교연구원, 2000.
  • 김방룡, 「사명당 유정의 승병활동과 공공행복」, 『동서철학연구』 제66호, 한국동서철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