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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 |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ref>이재룡,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606 조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510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 |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ref>이재룡,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606 조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 해 [[장경왕후 |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자 계비 책봉문제와 [[폐비 신씨 |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 문제의 중심에서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 일이 [[반정공신]]과 [[신진사류 |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 이후 [[기묘사화]]의 발생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ref>이재룡,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606 조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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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년 [[소격서 |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하였으며, 그 해 11월에는 [[현량과 | 현량과(賢良科)]]의 시행을 추진하였다. <ref>이재룡,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1606 조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519년 가을 [[정국공신 | 정국공신(靖國功臣)]] 의 개정 문제를 주장하였다. 이를 반대하던 기존 훈구세력과 대립으로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조광조와 그의 일파인 [[윤자임 | 윤자임(尹自任)]], [[이자 | 이자(李耔)]], [[김구 | 김구(金絿)]], [[박세희 | 박세희(朴世熹)]] 등의 신진세력들이 축출되었다.<ref>김영두,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0 조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519년 가을 [[정국공신 | 정국공신(靖國功臣)]] 의 개정 문제를 주장하였다. 이를 반대하던 기존 훈구세력과 대립으로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조광조와 그의 일파인 [[윤자임 | 윤자임(尹自任)]], [[이자 | 이자(李耔)]], [[김구 | 김구(金絿)]], [[박세희 | 박세희(朴世熹)]] 등의 신진세력들이 축출되었다.<ref>김영두,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0 조광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2017년 11월 16일 (목) 18:07 판

조광조(趙光祖)
대표명칭 조광조
한자표기 趙光祖
생몰년 1482-1519
본관 한양(漢陽)
정암(靜菴)
효직(孝直)
시대 조선
국적 조선
조원강(趙元綱)
민의(閔誼)의 딸 여흥 민씨


정의

조광조(趙光祖)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1510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1] 1518년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하였으며, 그 해 11월에는 현량과(賢良科)의 시행을 추진하였다. [2] 1519년 가을 정국공신(靖國功臣) 의 개정 문제를 주장하였다. 이를 반대하던 기존 훈구세력과 대립으로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조광조와 그의 일파인 윤자임(尹自任), 이자(李耔),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등의 신진세력들이 축출되었다.[3]

학문과 정치 사상

성리학은 이미 고려 말에 전래되어 학자들에게 알려졌으나, 성리학을 실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성종(成宗) 때 김종직의 문인들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한훤당 김굉필이 그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되는데, 조광조는 김굉필의 문인이었다.[4] 스승의 영향을로 조광조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5]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이 나오는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 조광조는 다스림의 근본인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치의 주체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6] 저서로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책(策)·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7]

사후의 평가

조광조는 지치주의에 입각하여 지나치게 과격한 개역정치를 단행하다가 훈구세력의 견제로 사사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된 후 조광조는 도학의 정통으로 추종되었으며 1569년 신원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8] 같은 시기 그를 기리기 위해 정암 조광조선생 적려 유허비가 제작되었는데 이 비의 비문을 쓴 사람이 바로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9] 또한 조광조의 행장인 정암 조선생 행장 퇴계 이황이 작성하였다.
  1. 이재룡, "조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재룡, "조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영두, "조광조",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김영두, "조광조",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이재룡, "조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영두, "조광조",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이재룡, "조광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김영두, "조광조",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9. "조광조 유허비", 『우리역사넷』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