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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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은 강진 귤동마을에 살던 윤단(尹慱)의 산정이었으나 다산에게 초당을 내어주고 자신의 아들 윤문거를 비롯한 삼형제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다산은 양반 18명, 중인 6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고 저술활동을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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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은 강진 귤동마을에 살던 윤단(尹慱)의 산정이었으나 다산에게 초당을 내어주고 자신의 아들 [[윤문거]]를 비롯한 삼형제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다산은 양반 18명, 중인 6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고 저술활동을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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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9일 (일) 19:54 판


정약용과 저술
정창섭-다산초당(정약용)-1979s.jpg
작가 정창섭
제작연도 1979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학술
분류 유화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개요

전남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이 10년간 머물며 제자들과 함께 저서를 편집한 다산초당 앞뜰에 서서 사색하는 모습을 그렸다.

설명

작품 소재

다산초당은 강진 귤동마을에 살던 윤단(尹慱)의 산정이었으나 다산에게 초당을 내어주고 자신의 아들 윤문거를 비롯한 삼형제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다산은 양반 18명, 중인 6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고 저술활동을 하였다.

작품 배경

다산이 생활했던 초당은 1936년에 완전히 해체돼 폐허가 되었으나,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출범하면서 해남 윤씨와 강진 관내 유지들의 성금으로 지금의 중심 건물이 복원되었다. 초당뒤 석벽에 다산이 직접 새긴 글씨인 정석(丁石), 뒷담 밑에 마르지 않는 샘물인 약천(藥泉), 약천의 샘물로 앞 뜰에서 차를 달이던 바위인 다조(茶竈), 초당 동쪽 연못에 탐진강에서 가져온 돌로 가산을 쌓은 연지가석산(蓮池石假山)을 일컬어 다산사경(茶山四景)이라 한다.[1]

작품 구도

그림의 오른쪽으로 연지석가산이 보이고, 다산초당 앞에는 차를 달이던 바위인 다조가 있다.


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창섭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A는 B를 그렸다 1975년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다산초당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정약용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인천시립박물관 정창섭-정약용과 저술 A는 B를 대여하였다 1991년 04월 18일-1992년 04월 17일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9년 정창섭가 정창섭-정약용과 저술를 제작하였다.
1991년 04월 18일-1992년 04월 17일 인천시립박물관가 정창섭-정약용과 저술를 대여하였다.
1998년- 한국학중앙연구원가 정창섭-정약용과 저술를 소장하고 있다.
위도 경도 내용
37.4205792 126.6512053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이 인천시립박물관에 대여되었다.
37.3915557 127.0547403 정창섭-정약용과 저술이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장되어 있다.
34.579066 126.746974 다산초당은 전남 강진에 위치한다.
37.516841 127.300016 다산정약용유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다.


그래프


참고문헌

  • 정민,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2011년.

주석

  1. "주희춘, [광복70주년 기획시리즈우리 강진은 이렇게 살았다 15.50년대말 강진의 경제와 문화]", 『강진일보』, 2015년 07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