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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려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칠탄(七灘). 아버지는 이진수(李眞洙)이다. 이광려는 인품도 훌륭했고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광려는 문장에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문인(門人)에게 그대로 전해져 신대우(申大羽)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ref>고경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74 이광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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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려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칠탄(七灘). 아버지는 이진수(李眞洙)이다. 이광려는 [[정제두]]의 문인으로 [[강화학파]]를 계승한 인물이다. 또한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광려는 문장에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문인(門人)에게 그대로 전해져 신대우(申大羽)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ref>고경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74 이광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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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당시의 시대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책을 통하여 [[고구마]]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 | 조엄(趙曮)]]이 대마도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오자 곧 재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시도는 당시 동래부사(東萊府使)였던 강필리(姜必履)에게 자극을 주어 고구마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한 밑바탕이 됐다.<ref>고경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74 이광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한편, 그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당시의 시대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책을 통하여 [[고구마]]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 | 조엄(趙曮)]]이 대마도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오자 곧 재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시도는 당시 동래부사(東萊府使)였던 강필리(姜必履)에게 자극을 주어 고구마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한 밑바탕이 됐다.<ref>고경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74 이광려]",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2017년 11월 8일 (수) 21:51 판

이광려(李匡呂)
대표명칭 이광려
한자표기 李匡呂
생몰년 1720-1783
본관 전주(全州)
월암(月巖)·칠탄(七灘)
성재(聖載)
시대 조선
국적 조선
이진수(李眞洙)


정의

이광려(李匡呂, 1720-1783)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내용

생애

이광려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칠탄(七灘). 아버지는 이진수(李眞洙)이다. 이광려는 정제두의 문인으로 강화학파를 계승한 인물이다. 또한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광려는 문장에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문인(門人)에게 그대로 전해져 신대우(申大羽)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1]

활동

한편, 그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당시의 시대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책을 통하여 고구마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1763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曮)이 대마도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오자 곧 재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시도는 당시 동래부사(東萊府使)였던 강필리(姜必履)에게 자극을 주어 고구마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한 밑바탕이 됐다.[2]

저술활동

저서로는 『이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3] 또한 이광려는 이광사의 묘비인 「원교선생묘지명(圓嶠先生墓誌銘)」을 쓰기도 했는데 여기에 묘사된 이광사의 외형은 그의 초상화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 고경식, "이광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고경식, "이광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고경식, "이광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광사초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