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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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14일 (목) 14:37 판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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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방
(元曉房)
대표명칭 원효방
한자표기 元曉房
소장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관련인물 원효(元曉)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개암사(開巖寺) 뒤에 위치한 석굴(石窟).[1]


내용

원효방(元曉房)은 개암사(開巖寺) 뒤 울금바위에 있는 석굴(石窟)로, 신라시대의 승려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원효방의 형태가 어떤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토굴이나 석굴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문신 이규보(李奎報)가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남긴 글로 보아, 이 석굴이 원효방으로 추정된다.[2]

Quote-left.png 다음날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 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동국이상국전집 제23권 기(記),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Quote-left.png 변산을 능가라고도 한다. 옛날 원효가 살던 방장(方丈)이 지금까지 있는데, 한 늙은 비구승(比丘僧)이 혼자 수진(修眞)하면서 시중드는 사람도 솥ㆍ탕반 등 밥짓는 도구도 없이 날마다 소래사(蘇來寺)에서 재만 올릴 뿐이었다.

산을 따라 위태로운 사다리 건너고 / 循山度危梯

발을 겹치며 선로를 다니네 / 疊足行線路

위엔 백 길의 산마루 있으니 / 上有百仞巓

원효가 일찍이 집 짓고 살았네 / 曉聖曾結宇

신령의 자취 어디로 사라졌나 / 靈蹤杳何處

남긴 진영 비단에 머물러 있구나 / 遺影留鵝素

다천에 맑고 깨끗한 물 괴었으니 / 茶泉貯寒玉

마시매 그 맛 젓과 같구려 / 酌飮味如乳

이곳에 옛날에는 물이 나오지 않아 / 此地舊無水

스님들이 살아갈 수 없었다는데 / 釋子難棲住

원효가 한번 와서 산 뒤에는 / 曉公一來寄

바위 구멍에서 단물이 솟아났네 / 甘液湧巖竇

우리 선사가 높은 도를 이어받아 / 吾師繼高蹲

짧은 갈초 입고 이곳에 사네 / 短葛此來寓

돌아보건대 팔 척쯤 되는 방에 / 環顧八尺房

한쌍의 신발이 있을 뿐이구나 / 惟有一雙屨

시중드는 자도 없으니 / 亦無侍居者

홀로 앉아 세월을 보내누나 / 獨坐度朝暮

소성이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 小性復生世 원효대사(元曉大師)를 세상에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도 한다.

감히 굽혀 절하지 않겠는가 / 敢不拜僂傴

Quote-right.png
출처: "팔월 이십일에 능가산(楞迦山) 원효방(元曉房)에 제하다병서", 東國李相國全集卷第九 古律詩,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원효방과 관련한 이야기

원효(元曉)는 삼국 통일 이후 부안에 왔는데, 그 시기엔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이 원한과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백제 무왕왕사(王師)였던 묘련스님이 창건한 개암사 뒤 울금바위에 위치한 동굴에 원효가 왔다. 이 굴 옆에는 수백명이 머물 수 있는 대규모 굴들이 있었고, 울금바위 뒤쪽엔 백제부흥군들이 베를 짜 옷을 해 입었다는 베틀굴이 있었다. 원효는 이곳에서 가끔 저 김제평야로 나가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열었다. 야단법석에서 백성들과 함께 춤추며 원한과 갈등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상생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 사복(蛇福)도 이 토굴에 같이 머물렀는데, 원효에게 차를 끓어주려고 해도 물이 없었는데, 난데없이 바위틈에서 물이 새어나와, 달콤한 차맛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3]


지식 관계망

  • 원효와 의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남행월일기 원효방 A는 B를 묘사하였다
원효방 원효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원효방", 『원효의 유적지』online.
  2. "원효방", 『원효의 유적지』online.
  3. "원효방의 샘물",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4. "우금암(禹金巖, 일명 울금바위)", 2013년 종단역사 사진전(2), 『종단역사 사진전』online.
  5. "원효방",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6. "원효방",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7. "원효방",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문화원형라이브러리』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원효방의 샘물",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
    • "남행월 일기",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 "원효방", 『원효의 유적지』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