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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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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는 676년에 [[의상|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당나라에서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양양 낙산사|양양 낙산사(襄陽 洛山寺)]]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ref>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0 - 경북북부』,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5387&cid=42840&categoryId=42845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북북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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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8일 (금) 20:45 판

영주 부석사
(榮州 浮石寺)
대표명칭 영주 부석사
영문명칭 Buseoksa Temple, Yeongju
한자 榮州 浮石寺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건립시기 676년
창건자 의상(義湘)
경내문화재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영주 부석사 조사당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1]

내용

부석사는 676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절이다. 당나라에서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양양 낙산사(襄陽 洛山寺)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2]


Quote-left.png 16년 봄 2월에 고승(高僧) 의상(義相)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3]



의상이 주석하여 화엄사상을 닦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부석사는 화엄종찰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인 의상의 문하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는 노비 출신도 있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가난한 군인도 있었으며 법을 물으러 오는 학자들도 있었다. 의상의 손제자인 신림 이후 9세기에 들어 부석사는 ‘대덕’(大德)의 호칭을 받은 법사가 많이 배출되었고 승려가 되기 위해 부석사에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대중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다. 의상 때에 조촐했던 규모도 제법 커져서 대석단 위에 여러 당우를 갖춘 거대한 가람이 이루어졌고, 지금의 강릉지방인 명주(溟州)에 장사(莊舍)를 보유할 만큼 재정 기반도 넉넉해졌다. 부석사는 초창 때보다도 9세기 이후 왕권과 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후삼국이 쟁투를 벌일 때 궁예가 부석사에 쳐들어와서 벽에 그려진 신라 왕의 초상을 칼로 내리쳤다는 기록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화엄종의 종찰인 부석사에서 하대의 새로운 기운인 선종의 산문을 여는 승려들이 출가 초기에 화엄학을 수학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신라의 화엄종은 교종이었고 이는 호국불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신라 하대의 선종은 지방의 호족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 사회적 성격이나 기반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부석사에는 선종 구산 가운데 동리산파의 개조인 혜철(785~861)이 800년부터 7년 동안 머물렀고 성주산파의 무염(800~888)도 820년 무렵에 여러 해 머물다 당나라로 유학갔으며, 문경 봉암사의 창건주인 희양산파의 개조 도헌(824~882)은 9세에 출가하여 17세에 계를 받을 때까지 부석사에서 공부했으며, 사자산파 도융의 제자인 절중(826~900)도 15세에 부석사에 와서 화엄경을 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원융대덕(圓融大德, 964~1053)이 주석하면서 대장경을 찍었는데, 그 경판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고려 말에 이르러 공민왕 때에 국사로 봉해진 진각국사 원응(圓應, 1307~1382)은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건하였다. 아마 공민왕 7년(1358)에 입은 왜적의 병화로 무너진 전각들을 다시 세워야 했을 것이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선달’이란 ‘부석’의 뜻을 풀어 한글로 적은 ‘선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부석사는 초기에 의상이 터를 잡을 때의 조촐한 모습보다는 규모와 위엄을 지닌 면모를 더해갔다. 배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부석사는 웬만한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고 1493년에는 단청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1555년에 소실된 안양루를 20년 뒤인 1576년에 중건하는가 하면 범종각도 1746년 불탔을 때에 곧바로 다시 지을 만큼 부석사는 힘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기록인 『순흥읍지』에는 무량수전, 조사당말고도 취원루, 그 북쪽에 장향대, 무량수전 동쪽에 상승당, 안양문 앞에 법당·선당·승당과 종각 아래에 당우가 대여섯 채나 있던 모습을 전하고 있으니 지금보다도 절이 더 꽉차 보였음직하다.

근대에 들어서는 1916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수리하였고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고 하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전체 사역을 정비하면서 일주문과 천왕문, 승당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6년 초에는 유물각을 개수하여 유물전시각으로 꾸몄다.

부석사에는 9세기 때 쌓았다고 여겨지는 대석단과 함께 아름다운 석물들이 많다.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균형미에 장식미를 더한,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아름다운 석등이다. 절 초입의 늘씬한 당간지주도 석등과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무량수전 마당 동쪽에는 균형미를 갖춘 삼층석탑이 있으며 경내에는 1967년에 인근 동쪽 골짜기의 옛절터에서 옮겨온 삼층석탑 한 쌍과 비로자나불, 아미타불도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의 유물로 대표적인 것은 무량수전에 모신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며, 조사당에 있던 14세기의 고려시대 벽화는 지금 유물전시각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대장경 각판도 귀중한 유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돌베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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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상국, "부석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0 - 경북북부』, 돌베개, 2010. 온라인 참조: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북북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다(676년 2월 (음))", 『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