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당기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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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3차에 걸친 [[윤증 초상(전신상)|윤증 초상]]의 개모과정과 이를 그린 화가 등을 상세히 서술한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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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부터 1885년까지 3차에 걸쳐 [[윤증 초상(전신상)|윤증 초상]]을 고쳐 그린 과정을 상술한 책이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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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표지에 직접 쓴 첩명(帖名)이 있으며, 다음 장에는 '영당사적(影堂事蹟)'이라 적혀 있다. 이어 이한철이 1885년에 종택의 경승재(敬勝齋)에서 그린 `유봉전도(酉峰全圖)'와, 같은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 폭의 실경(實景)이 그려져 있다.<ref>"[http://myeongjae.com/_xb/board_fZrk40/1366 영당기적:중요민속자료22-12-1]", 명재家유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명재고택』<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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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직접 쓴 첩명(帖名)이 있으며, 다음 장에는 '영당사적(影堂事蹟)'이라 적혀 있다. 이어 이한철이 1885년에 종택의 경승재(敬勝齋)에서 그린 「유봉전도(酉峰全圖)」와, 같은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 폭의 실경(實景)이 그려져 있다.<ref>"[http://myeongjae.com/_xb/board_fZrk40/1366 영당기적:중요민속자료22-12-1]", 명재家유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명재고택』<sup>online</sup></online></html>.</ref>
  
두 그림 모두 조감도 형식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시점에서 현 종택을 중앙에 두고 네 방향에 이를 둘러싼 산세를 표현하고 있어 지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회화성도 엿볼 수 있다. 두 그림에 이어 초상 제작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있다.<ref>"[http://myeongjae.com/_xb/board_fZrk40/1366 영당기적:중요민속자료22-12-1]", 명재家유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명재고택』<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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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그림 모두 조감도 형식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시점에서 현 종택을 중앙에 두고 이를 둘러싼 산세를 네 방향에서 표현하고 있어 지도처럼 보이면서 회화성도 함께 엿볼 수 있다. 두 그림에 이어 초상 제작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있다.<ref>"[http://myeongjae.com/_xb/board_fZrk40/1366 영당기적:중요민속자료22-12-1]", 명재家유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명재고택』<sup>online</sup></online></html>.</ref>
  
영당기적에 따르면 윤증 초상은 1711년에 [[변량]]이란 화사에 의해 처음으로 그려진 후, 사후인 1744, 1788, 1885년에 [[장경주]], [[이명기]], [[이한철]]에 의해 각각 변량본을 원본으로 한 차례의 개모(改模)가 있었다. 또한 영당기적에는 이외에도 초상을 모신 영당의 의례와 중수 기록, 낡은 초상의 세초 기록, 영당의 관리 기록 등도 포함되어 있어, 조선시대 향촌의 일반 사대부가에서 초상을 제작하고 관리하였던 실태를 상세히 전해 준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세 차례의 개모시 부조기(扶助記)가 게재되어 있어 [[윤증]]의 초상을 후손들을 포함한 소론의 당인들이 공동으로 제작하고 소론의 행사처럼 치른 모습을 알 수 있다.<ref>"[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637&bbsId=BBSMSTR_1008&mn=NS_01_10 명재 윤증尹拯 초상 제작과 영당기적影堂紀蹟]", 새소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 문화재 사랑』<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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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모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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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기적』에 따르면 윤증 초상은 1711년에 [[변량]]이란 화사에 의해 처음으로 그려진 후, 사후인 1744, 1788, 1885년에 변량본을 원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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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장경주]], [[이명기]], [[이한철]] 등이 차례 개모(改模)하였다. 이외에도 초상을 모신 영당의 의례와 중수 기록, 낡은 초상의 세초 기록, 영당의 관리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시대 향촌의 일반 사대부가에서 초상을 제작하고 관리하였던 실태를 상세히 전해 준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세 차례의 개모시 부조기(扶助記)가 게재되어 있어 [[윤증]]의 초상을 후손들을 포함한 소론의 당인들이 공동으로 제작하고 소론의 행사처럼 치른 모습을 알 수 있다.<ref>"[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637&bbsId=BBSMSTR_1008&mn=NS_01_10 명재 윤증尹拯 초상 제작과 영당기적影堂紀蹟]", 새소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 문화재 사랑』<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8년 1월 2일 (화) 17:07 판

영당기적(影堂紀蹟)
대표명칭 영당기적
한자표기 影堂紀蹟
유형 필사본
소장처 충청남도역사박물관



정의

1711년부터 1885년까지 3차에 걸쳐 윤증 초상을 고쳐 그린 과정을 상술한 책이다.

구성

표지에 직접 쓴 첩명(帖名)이 있으며, 다음 장에는 '영당사적(影堂事蹟)'이라 적혀 있다. 이어 이한철이 1885년에 종택의 경승재(敬勝齋)에서 그린 「유봉전도(酉峰全圖)」와, 같은 화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 폭의 실경(實景)이 그려져 있다.[1]

두 그림 모두 조감도 형식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시점에서 현 종택을 중앙에 두고 이를 둘러싼 산세를 네 방향에서 표현하고 있어 지도처럼 보이면서 회화성도 함께 엿볼 수 있다. 두 그림에 이어 초상 제작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있다.[2]

개모 과정

『영당기적』에 따르면 윤증 초상은 1711년에 변량이란 화사에 의해 처음으로 그려진 후, 사후인 1744, 1788, 1885년에 변량본을 원본으로

하여 장경주, 이명기, 이한철 등이 세 차례 개모(改模)하였다. 이외에도 초상을 모신 영당의 의례와 중수 기록, 낡은 초상의 세초 기록, 영당의 관리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어, 조선시대 향촌의 일반 사대부가에서 초상을 제작하고 관리하였던 실태를 상세히 전해 준다. 또한 책의 말미에는 세 차례의 개모시 부조기(扶助記)가 게재되어 있어 윤증의 초상을 후손들을 포함한 소론의 당인들이 공동으로 제작하고 소론의 행사처럼 치른 모습을 알 수 있다.[3]

지식 관계망

  • 윤증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영당기적 윤증 초상(전신상)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영당기적 윤증 초상(반신상) A는 B를 묘사하였다 A ekc:depicts B
영당기적 윤증 A는 B와 관련이있다 A edm:isRelatedTo B
영당기적 장경주 A는 B를 언급한다 A mentions B
영당기적 이명기 A는 B를 언급한다 A mentions B
영당기적 이한철 A는 B를 언급한다 A mentions B

주석

  1. "영당기적:중요민속자료22-12-1", 명재家유물, 『명재고택』online.
  2. "영당기적:중요민속자료22-12-1", 명재家유물, 『명재고택』online.
  3. "명재 윤증尹拯 초상 제작과 영당기적影堂紀蹟", 새소식, 『월간 문화재 사랑』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