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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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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지은 역사서이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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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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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燃藜室)’은 이긍익의 호이며, 『연려실기술』은 이긍익이 저술한 조선 시대 역사서이다. [[이긍익]]의 아버지인 [[이광사 | 이광사(李匡師)]]는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는데, 이긍익은 아버지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3&levelId=tg_003_2720&ganada=&pageUnit=10 연려실기술]",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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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燃藜室)’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호이며, 『연려실기술』은 이긍익이 저술한 조선 시대 역사서이다. 부친 [[이광사 | 이광사(李匡師)]]는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는데, 이긍익은 아버지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3&levelId=tg_003_2720&ganada=&pageUnit=10 연려실기술]",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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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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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재위 1392~1398)에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까지 각 왕대의 주요 사건을 담고 있는 ‘원집(原集)’, 저자 이긍익이 생존했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속집(續集)’, 전례⋅문예⋅천문⋅지리⋅대외 관계⋅고전 등을 편목별(篇目別)로 분류하여 연혁과 출처를 수록한 ‘별집(別集)’으로 구성되었다. 『연려실기술』의 주된 서술 방식은 기사본말체로서 원집, 속집에 적용되었다. 기사본말체는 시대 순으로 사건을 서술하되, 인과 관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게 한 서술 방식이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3&levelId=tg_003_2720&ganada=&pageUnit=10 연려실기술]",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에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까지 각 왕대의 주요 사건을 담고 있는 ‘원집(原集)’, 저자 이긍익이 생존했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속집(續集)’, 전례⋅문예⋅천문⋅지리⋅대외 관계⋅고전 등을 편목별(篇目別)로 분류하여 연혁과 출처를 수록한 ‘별집(別集)’으로 구성되었다. 『연려실기술』의 주된 서술 방식은 기사본말체로서 원집, 속집에 적용되었다. 기사본말체는 시대 순으로 사건을 서술하되, 인과 관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게 한 서술 방식이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3&levelId=tg_003_2720&ganada=&pageUnit=10 연려실기술]",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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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은 사건을 간략히 기재하고, 그 아래 여러 사서에서 발췌한 관련 자료를 열거한 후 끝에 출처를 밝힘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도우면서도 저자의 견해는 밝히지 않았다. 이는 『연려실기술』이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긍익은 국가 공식 기록보다 민간에서 정리된 야사⋅일기⋅문집 중 신뢰할 만한 기록을 중심으로 400여 종에 달하는 자료를 인용함으로써 객관성을 높이고 실증에 더욱 주력하였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3&levelId=tg_003_2720&ganada=&pageUnit=10 연려실기술]",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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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은 사건을 간략히 기재하고, 그 아래 여러 사서에서 발췌한 관련 자료를 열거한 후 끝에 출처를 밝혔다. 그럼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도우면서도 저자의 견해는 밝히지 않았다. 이는 『연려실기술』이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긍익은 국가 공식 기록보다 민간에서 정리된 야사⋅일기⋅문집 중 신뢰할 만한 기록을 중심으로 400여 종에 달하는 자료를 인용함으로써 객관성을 높이고 실증에 더욱 주력하였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203&levelId=tg_003_2720&ganada=&pageUnit=10 연려실기술]", <html><online style="color:purple">『우리역사넷』<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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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3일 (토) 20:12 기준 최신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표명칭 연려실기술
한자표기 燃藜室記述
유형 문헌
저자 이긍익(李肯翊)
저술시기 1776년
간행시기 1776년
시대 조선


정의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지은 역사서이다.

내용

저술배경

‘연려실(燃藜室)’은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호이며, 『연려실기술』은 이긍익이 저술한 조선 시대 역사서이다. 부친 이광사(李匡師)는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는데, 이긍익은 아버지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1]

구성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에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까지 각 왕대의 주요 사건을 담고 있는 ‘원집(原集)’, 저자 이긍익이 생존했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속집(續集)’, 전례⋅문예⋅천문⋅지리⋅대외 관계⋅고전 등을 편목별(篇目別)로 분류하여 연혁과 출처를 수록한 ‘별집(別集)’으로 구성되었다. 『연려실기술』의 주된 서술 방식은 기사본말체로서 원집, 속집에 적용되었다. 기사본말체는 시대 순으로 사건을 서술하되, 인과 관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게 한 서술 방식이다.[2]

특징

『연려실기술』은 사건을 간략히 기재하고, 그 아래 여러 사서에서 발췌한 관련 자료를 열거한 후 끝에 출처를 밝혔다. 그럼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도우면서도 저자의 견해는 밝히지 않았다. 이는 『연려실기술』이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긍익은 국가 공식 기록보다 민간에서 정리된 야사⋅일기⋅문집 중 신뢰할 만한 기록을 중심으로 400여 종에 달하는 자료를 인용함으로써 객관성을 높이고 실증에 더욱 주력하였다.[3]

지식 관계망

  • 이광사-김정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연려실기술 이긍익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이광사 이긍익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이광사 나주괘서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주석

  1. "연려실기술",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연려실기술",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연려실기술", 『우리역사넷』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존희, 「「燃藜室記述」의 分析的 考察 : 이긍익의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한국학보』 Vol.7, 일지사, 1981.
    • 신병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술이부작``의 정신, 역사서의 모범-」, 『선비문화』 Vol.22, 남명학연구원, 2012.
  • 웹자원
    •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