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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유희]](柳僖, 1773~1837)가 지은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서이다.  
 
[[유희]](柳僖, 1773~1837)가 지은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서이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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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유희]](柳僖, 1773~1837)가 지은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서이다. 유희는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표기하고, 훈민정음이 원나라 [[파스파]](Phags-pa, 八思巴)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이 책은 서(序), 초성례(初聲例), 중성례(中聲例), 종성례(終聲例), 전자례(全字例)로 구성되어있다. 초성례에서는 초성으로 쓰이는 25자모를 제시하고 도표로 작성하였다. 중성례에서는 중성(모음)의 15가지 형태를 설정하며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종성례에서는 7개의 종성을 설정하였다. 전자례에서는 초성 25자, 중성 15자, 종성 7자를 설정한 근거와 학설을 요약·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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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이 책은 종래 한자음 위주의 연구 방법을 지양하고, 우리말 위주로 문제에 접근한 첫 연구서이다. 조선 후기 훈민정음 연구서 중 뛰어난 저작으로 평가받아 현재까지 학자들의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42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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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훈민정음]]‘언문(諺文)’이라 표기하고, [[훈민정음]]이 원나라 [[파스파 문자 | 파스파(Phags-pa, 八思巴)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이 책은 서(序), 초성례(初聲例), 중성례(中聲例), 종성례(終聲例), 전자례(全字例)로 구성되어 있다. 초성례에서는 초성으로 쓰이는 25자모를 제시하고 도표로 작성하였다. 중성례에서는 중성(모음)의 15가지 형태를 설정하며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종성례에서는 7개의 종성을 설정하였다. 전자례에서는 초성 25자, 중성 15자, 종성 7자를 설정한 근거와 학설을 요약·집성하였다. 종래 한자음 위주의 연구 방법을 지양하고, 우리말 위주로 문제에 접근한 첫 연구서이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42쪽.</ref><!--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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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지』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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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지』는 서문, 초성례, 중성례, 종성례, 전자례의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부분마다 첫 번째는 참고문헌의 내용을 나열하고, 그 뒤에 자신이 “교정(校定)”한 규범들을 “유씨교정ㅇㅇ(柳氏校定某某)”라는 형식으로 곁들인 뒤에 이 교정 부분 아래에 문답식으로 교정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마지막 단위의 전자례(全字例)에서는 초․중․종성을 조합하여 생성되는 글자(음절)의 숫자를 계산해 놓았다.<ref>신수영, 「《언문지(諺文志)》의 체제와 유희(柳僖)의 언어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ref>
  
==부연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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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와 강화학파===
유희의 스승인 [[정동유 | 정동유(鄭東愈)]]는 조선 양명학 학자 정제두(鄭齊斗)의 제자 이광려(李匡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강화학파 | 강화학파(江華學派)]]라 불리며 조선 후기의 운학 연구를 주도하였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학문 자체에 경주하기 보다는 시문이나 사학, 국어사 등 인문과학적 연구에 집중하였다. 양명학은 당대 민족과 민족이 처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었으며 역사, 국토, 언어 등의 연구를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흐름을 따라 조선 후기 국학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당시 성리학자들에 의해 양명학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사상적 연구보다는 국어학 연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배경 또한 고려해봐야 할 사항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유희가 언문을 연구하는 서적을 저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게다가 난립한 언문의 표기를 바로잡는것은 양명학의 격물(格物 :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의 이치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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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의 스승인 [[정동유 | 정동유(鄭東愈)]]는 조선 [[양명학]] 학자 [[정제두]](鄭齊斗)의 제자 [[이광려]](李匡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강화학파 | 강화학파(江華學派)]]라 불리며 조선 후기의 운학 연구를 주도하였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학문 자체에 경주하기 보다는 시문이나 사학, 국어사 등 인문과학적 연구에 집중하였다. [[양명학]]은 당대 민족과 민족이 처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역사, 국토, 언어 등의 연구를 민족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조선 후기 국학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될 수 있었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양명학]]을 사문난적<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08627 사문난적],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斯文亂賊:유교(주자의 학설)를 어지럽히는 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곤 했다. 조선의 정쟁사를 살펴보면 정적을 제거할 명분으로 사문난적이라는 수단을 사용해하고는 했다. 그러므로 당시 양명학자들은 성리학자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상적 연구보다는 국어학 연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양명학 학자들 가운데 국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로 이와 같은 시대배경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유희가 언문을 연구하는 서적을 저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게다가 난립한 언문의 표기를 바로잡는것은 양명학의 격물(格物 :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의 이치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br/>
유희는 『언문지』의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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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는 『언문지』의 서문에서 "스승이신 정동유(鄭東愈)선생은 격물(格物)에 빼어난 분으로 일찍이 내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언문이 오묘하다는 것을 아는가? 무릇 글자의 소리로써 글자의 소리를 전하니 이것이 변하면 저것도 따라서 변하게 되어 옛날과 오늘날의 음을 협운(叶韻)하여 자주 어긋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언문으로 주(註)를 하게 되면 그것 글자의 음을 오랫동안 전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진실함 즉 본래의 한자음을 잃는다고 걱정하겠는가. 하물며 문장은 반드시 간결하고 오묘함을 숭상하는데 간결하고 오묘함으로써 정감을 통하면 잘못 보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언문으로 주고 받으면 만에 하나도 의심되는 바가 없으니 그대는 부녀자가 배운다는 이유로 그것(諺文)을 홀시하지 말라'……이에 나는 [[정동유]] 선생과 더불어 검토하고 연구하였다. 이미 수개월이 되었으니 돌아와 책 한 권을 짓고 《『언문지』諺文志)》라 이름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스승이신 정동유(鄭東愈)선생은 격물(格物)에 빼어난 분으로 일찍이 내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언문이 오묘하다는 것을 아는가 무릇 글자의 소리로써 글자의 소리를 전하니 이것이 변하면 저것도 따라서 변하게 되어 옛날과 오늘날의 음을 협운(叶韻)하여 자주 어긋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언문으로 주(註)를 하게 되면 그것 글자의음을 오랫동안 전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진실함 즉 본래의 한자음을잃는다고 걱정하겠는가 하물며 문장은 반드시 간결하고 오묘함을 숭상하는데 간결하고 오묘함으로써 정감을 통하면 잘못 보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언문으로 주고 받으면 만에 하나도 의심되는 바가 없으니 그대는 부녀자가 배운다는 이유로 그것(諺文)을 홀시하지 말라”(鄭丈東愈工格物 嘗語不佞 子知諺文妙呼 夫以字音 此變彼隨變 古叶今韻 屢舛宜也若註以諺文 傳之久遠 寧失眞爲慮 況文章必尙簡奧 以簡奧通情 莫禁誤看 諺文往復 萬無一疑 子無以婦女學{忽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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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나는 정동유 선생과 더불어 검토하고 연구하였다 이미 수개월이 되었으니 돌아와 책 한 권을 짓고 《『언문지』諺文志)》라 이름하였다.(乃不佞與講辨 旣數月 歸著一書 名諺文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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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鄭丈東愈工格物 嘗語不佞 子知諺文妙呼 夫以字音 此變彼隨變 古叶今韻 屢舛宜也若註以諺文 傳之久遠 寧失眞爲慮 況文章必尙簡奧 以簡奧通情 莫禁誤看 諺文往復 萬無一疑 子無以婦女學忽之……乃不佞與講辨 旣數月 歸著一書 名諺文志) |출처= "언문지" 서문}}
라고 했는데 유희의 학문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정동유는 훈민정음을 높이 평가하였고 언문 체계를 정비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유희는 정동유와 함께 몇 개월의 연구를 진행한 결과물로서 『언문지』의 초본을 작성하였다. 그 후 최세진의 『사성통해』를 읽고 『언문지』를 완성하였는데 『사성통해』는 한자의 중국 음을 표시하고 있는 운서로 간행 시기와 유희가 살고 있던 시기의 한자음 그리고 최세진이 역관으로 중국에 가서 경험한 한자음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음운체계가 반영되고 있었다. 즉 유희가 『언문지』를 저술한 가장 주요한 의도는 복합적인 한자음을 바로잡고 한자를 바르게 표기하기 위해 한글의 음운체계부터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ref>신수영,『《언문지(諺文志)》의 체제와 유희(柳僖)의 언어관 연구』, 이화대학교, 200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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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지』의 저술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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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의 학문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정동유]]는 훈민정음을 높이 평가하였고 언문 체계를 정비하는 것에 뜻을 두었다. [[유희]]는 [[정동유]]와 수 개월간 연구를 진행한 결과물로 『언문지』의 초본을 작성하였다. 그 후 [[최세진]]의 [[사성통해|『사성통해』]]를 읽고 나서 『언문지』를 완성하였다. 『사성통해』는 한자의 중국 음을 표시하고 있는 운서로, 책이 간행된 시기와 [[유희]]가 살고 있던 시기의 한자음, [[최세진]]이 역관(譯官)<ref>통역을 맡은 관리.</ref>으로 중국에 가서 경험한 한자음까지 서로 다른 세 가지 음운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즉 유희가 『언문지』를 저술한 가장 주요한 의도는 복합적인 한자음을 바로잡고 한자를 바르게 표기하기 위해 한글의 음운체계부터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한자음의 표기만을 목적으로 『언문지』를 저술했던 것은 아니다. 유희는 『언문지』를 저술할 때 당시 가장 저명했던 운서인 [[박성원]]의 『[[화동정음통석운고]]』를 한자음 교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언문으로 한자음을 바르게 표기하는 유씨교정을 작성했는데 이는『언문지』에 실린 한자음뿐만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 또한 모두 표기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ref>신수영, 「《언문지(諺文志)》의 체제와 유희(柳僖)의 언어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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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지』는 그의 문집인 『문통(文通)』에 수록되어있으며, 정식 간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 1938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활자본으로 정식 간행했고, 다시 1974년 한양대학교 부설 국학연구원(國學硏究院)에서 영인하였다.<ref>신수영, 「《언문지(諺文志)》의 체제와 유희(柳僖)의 언어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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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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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문지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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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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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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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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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A013/A013.htm 화동정음통석운고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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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A012/A012.htm 훈몽자회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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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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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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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조선어학회에서 활자본으로 정식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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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 한양대학교 부설 국학연구원(國學硏究院)에서 영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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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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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 언문지 01 서문.jpg | 언문지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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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 언문지 02 본문.jpg | 언문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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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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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references/>
 
<references/>
  
[[분류:한글고문헌]]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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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정경일. 『한국운서의 이해』, 아카넷, 2002.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
 +
**강신항, 『국어학사』, 보성문화사, 1979.
 +
**유창돈, 『언문지주해』, 신구문화사, 1958.
 +
**강윤호, 「언문지」, 『한국의 명저』, 현암사, 1969.
 +
*논문
 +
**김민수, 「유희의 전기」, 『도남조윤제박사회갑기념논문집』, 신아사, 1964.
 +
*웹자원
 +
**강신항,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166 언문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분류:한글고문서]]
 +
[[분류:전시자료]] [[분류:문헌]]

2017년 11월 30일 (목) 22:13 기준 최신판

언문지
한글팀 언문지 02 본문.jpg
한자명칭 諺文志
영문명칭 A study book about Hunminjeongeum
작자 유희
간행시기 1824년
기탁처 진주유씨 서파후손가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c123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3.4×21.8㎝
판본 필사본
수량 1책
표기문자 한자, 한글


정의

유희(柳僖, 1773~1837)가 지은 훈민정음에 관한 연구서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유희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표기하고, 훈민정음이 원나라 파스파(Phags-pa, 八思巴)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이 책은 서(序), 초성례(初聲例), 중성례(中聲例), 종성례(終聲例), 전자례(全字例)로 구성되어 있다. 초성례에서는 초성으로 쓰이는 25자모를 제시하고 도표로 작성하였다. 중성례에서는 중성(모음)의 15가지 형태를 설정하며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종성례에서는 7개의 종성을 설정하였다. 전자례에서는 초성 25자, 중성 15자, 종성 7자를 설정한 근거와 학설을 요약·집성하였다. 종래 한자음 위주의 연구 방법을 지양하고, 우리말 위주로 문제에 접근한 첫 연구서이다. [1]

『언문지』의 구성

『언문지』는 서문, 초성례, 중성례, 종성례, 전자례의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각 부분마다 첫 번째는 참고문헌의 내용을 나열하고, 그 뒤에 자신이 “교정(校定)”한 규범들을 “유씨교정ㅇㅇ(柳氏校定某某)”라는 형식으로 곁들인 뒤에 이 교정 부분 아래에 문답식으로 교정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마지막 단위의 전자례(全字例)에서는 초․중․종성을 조합하여 생성되는 글자(음절)의 숫자를 계산해 놓았다.[2]

유희와 강화학파

유희의 스승인 정동유(鄭東愈)는 조선 양명학 학자 정제두(鄭齊斗)의 제자 이광려(李匡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들은 강화학파(江華學派)라 불리며 조선 후기의 운학 연구를 주도하였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나 학문 자체에 경주하기 보다는 시문이나 사학, 국어사 등 인문과학적 연구에 집중하였다. 양명학은 당대 민족과 민족이 처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역사, 국토, 언어 등의 연구를 민족 문제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이를 배경으로 조선 후기 국학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될 수 있었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양명학을 사문난적[3](斯文亂賊:유교(주자의 학설)를 어지럽히는 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곤 했다. 조선의 정쟁사를 살펴보면 정적을 제거할 명분으로 사문난적이라는 수단을 사용해하고는 했다. 그러므로 당시 양명학자들은 성리학자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상적 연구보다는 국어학 연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양명학 학자들 가운데 국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로 이와 같은 시대배경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유희가 언문을 연구하는 서적을 저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게다가 난립한 언문의 표기를 바로잡는것은 양명학의 격물(格物 :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의 이치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유희는 『언문지』의 서문에서 "스승이신 정동유(鄭東愈)선생은 격물(格物)에 빼어난 분으로 일찍이 내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언문이 오묘하다는 것을 아는가? 무릇 글자의 소리로써 글자의 소리를 전하니 이것이 변하면 저것도 따라서 변하게 되어 옛날과 오늘날의 음을 협운(叶韻)하여 자주 어긋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언문으로 주(註)를 하게 되면 그것 글자의 음을 오랫동안 전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진실함 즉 본래의 한자음을 잃는다고 걱정하겠는가. 하물며 문장은 반드시 간결하고 오묘함을 숭상하는데 간결하고 오묘함으로써 정감을 통하면 잘못 보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언문으로 주고 받으면 만에 하나도 의심되는 바가 없으니 그대는 부녀자가 배운다는 이유로 그것(諺文)을 홀시하지 말라'……이에 나는 정동유 선생과 더불어 검토하고 연구하였다. 이미 수개월이 되었으니 돌아와 책 한 권을 짓고 《『언문지』諺文志)》라 이름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Quote-left.png 鄭丈東愈工格物 嘗語不佞 子知諺文妙呼 夫以字音 此變彼隨變 古叶今韻 屢舛宜也若註以諺文 傳之久遠 寧失眞爲慮 況文章必尙簡奧 以簡奧通情 莫禁誤看 諺文往復 萬無一疑 子無以婦女學忽之……乃不佞與講辨 旣數月 歸著一書 名諺文志) Quote-right.png
출처: "언문지" 서문


『언문지』의 저술 의도

유희의 학문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정동유는 훈민정음을 높이 평가하였고 언문 체계를 정비하는 것에 뜻을 두었다. 유희정동유와 수 개월간 연구를 진행한 결과물로 『언문지』의 초본을 작성하였다. 그 후 최세진『사성통해』를 읽고 나서 『언문지』를 완성하였다. 『사성통해』는 한자의 중국 음을 표시하고 있는 운서로, 책이 간행된 시기와 유희가 살고 있던 시기의 한자음, 최세진이 역관(譯官)[4]으로 중국에 가서 경험한 한자음까지 서로 다른 세 가지 음운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즉 유희가 『언문지』를 저술한 가장 주요한 의도는 복합적인 한자음을 바로잡고 한자를 바르게 표기하기 위해 한글의 음운체계부터 정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한자음의 표기만을 목적으로 『언문지』를 저술했던 것은 아니다. 유희는 『언문지』를 저술할 때 당시 가장 저명했던 운서인 박성원의 『화동정음통석운고』를 한자음 교정의 기준으로 삼았다. 거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언문으로 한자음을 바르게 표기하는 유씨교정을 작성했는데 이는『언문지』에 실린 한자음뿐만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소리 또한 모두 표기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5]
『언문지』는 그의 문집인 『문통(文通)』에 수록되어있으며, 정식 간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 1938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서 활자본으로 정식 간행했고, 다시 1974년 한양대학교 부설 국학연구원(國學硏究院)에서 영인하였다.[6]

지식 관계망

  • 언문지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언문지 유희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훈민정음 언문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정동유 유희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언문지 사성통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사성통해]] 최세진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언문지 화동정음통석운고 A는 B를 본떴다 A dcterms:references B
화동정음통석운고 박성원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언문지 문통 A는 B에 포함된다 A dcterms:isPartOf B
사주당이씨 유희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태교신기언해 사주당이씨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태교신기언해 유희 A는 B에 의해 언해되었다 A ekc:translator B
강화학파 정제두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언문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강화학파 유희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강화학파 정동유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언문지 정동유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24년 유희가 언문지를 저술하였다.
1938년 조선어학회에서 활자본으로 정식 간행되었다.
1974년 한양대학교 부설 국학연구원(國學硏究院)에서 영인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2258 127.054364 언문지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42쪽.
  2. 신수영, 「《언문지(諺文志)》의 체제와 유희(柳僖)의 언어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3. "사문난적, 『두산백과』online.
  4. 통역을 맡은 관리.
  5. 신수영, 「《언문지(諺文志)》의 체제와 유희(柳僖)의 언어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6. 신수영, 「《언문지(諺文志)》의 체제와 유희(柳僖)의 언어관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정경일. 『한국운서의 이해』, 아카넷, 2002.
    • 최현배, 『고친 한글갈』, 정음사, 1961.
    • 강신항, 『국어학사』, 보성문화사, 1979.
    • 유창돈, 『언문지주해』, 신구문화사, 1958.
    • 강윤호, 「언문지」, 『한국의 명저』, 현암사, 1969.
  • 논문
    • 김민수, 「유희의 전기」, 『도남조윤제박사회갑기념논문집』, 신아사, 1964.
  • 웹자원
    • 강신항, "언문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