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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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8일 (월) 17: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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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대표명칭 승정원일기
한자표기 承政院日記
저술시기 조선
시대 조선
크기 41.2cmx29.4cm
지정번호 국보 제303호
지정일 1999.04.09


정의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기이다.

내용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처리한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한 일기이다. 현재 인조 원년(1623) 3월부터 순종 융희 4년(1910) 8월까지의 기록이 3,243책의 필사본으로 남아있으며, 판형은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41.2cm * 29.4cm 이다. 국보 제303호로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1년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되었다.[1]

작성방식

  • 참여관원

승정원의 직제는 도승지 이하 정3품의 승지 6인과 정7품의 주서(注書) 2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승정원일기는 주서가 맡아 작성했다. 주서는 2인이었는데 필요에 따라 임시로 가주서(假注書) 1인을 더 둘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 관련 기사를 전담해 기록하기 위해 사변가주서 1인을 더 두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없어지지 않고 상설화되었다. 그런데 주서 자리는 공석으로 두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승정원일기는 가주서와 사변가주서가 상ㆍ하번으로 나누어 입시해 작성했다. 물론 주서 한 사람으로 모든 기록을 받아쓰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사관 두 사람이 함께 입시하여 사초(史草)를 작성하므로 1인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2]

  • 자료 수집 및 작성

주서는 매일 국왕이 정사를 보는 앞에서 사관(史官)과 함께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과정을 기록 하여 메모한 초책(草冊;속기록)을 하루치씩 하번주서(下番注書)에게 정서하게 하고, 상소(上疏)나 서계(書啓)와 같은 문자로 된 문건은 서리에게 베끼게 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그날의 일기가 만들어지고 한달 또는 반달 치씩 묶어 표지에 연월일을 적어 승지에게 제출하여 승정원에 보관하게 했다. 분량이 많을 경우에는 두 책으로 나누었으며 윤달의 일기는 따로 성책하였다.[3]

일기의 소실과 개수

  • 소실

조선 전기부터 승정원일기는 지속적으로 작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건으로 인해 일기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선조 이전의 일기는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불타고 말았으며, 임진왜란 이후 인조 원년 (1623)까지 기록된 일기도 이괄(李适)의 난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가 다시 임진왜란 이후의 일기를 개수하였으나 영조 20년(1744) 승정원의 화재로 다시 한 번 불에 타고 말았다. 영조 20년의 화재 당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경종 원년(1721)까지의 일기가 소실되면서 영조 22년(1746) 일기청이 설치되어 승정원일기의 개수작업에 착수하였다. 고종 25년(1888)에도 또다시 승정원의 화재로 철종 2년(1851)에서 고종 25년(1888)까지의 일기 361책이 소실되었고, 2년 뒤인 1890년 개수하였다.[4]

  • 개수작업

정조 대 일기의 개수를 위해 설치한 일기청은 개수를 위해 조보(朝報)를 비롯해 각 사(司)의 일기ㆍ등록 등 기본 사료와 관인의 일기문집 등을 널리 이용해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말에 548책의 개수를 완료하였다. 이것은 본래 소실된 책수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5]

의의

  • 정책 수립의 기초자료로서의 활용

승정원일기는 국정 전반에 걸친 매일매일의 일기를 날짜 순으로 망라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자세한 기초사료이며, 일차사료이다. 따라서 당시에도 정책에 참고할 알아 있으면 반드시 승정원일기를 꺼내어 그 전의 사례를 찾아보았다. 기본적인 정책 수립의 기초자료라 할 수 있다.[6]

  • 사료적 가치

조선시대 국정에 관한 기본자료로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등이 있으나 실록은 여러 기록들을 선별하여 편찬된 자료이고, 그나마 인조 이후에는 부실하다. 일성록은 세도정치기는 실록에 비해 비교적 잘 작성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에 비해 내용이 소략하다. 뿐만 아니라 고종 이후에는 승정원일기가 우리 근대사 분야의 공식기록이었으므로 자료적 가치는 더욱 높다. 게다가 매일 기록되는 날씨는 조선시대 자연현상에 대한 기초 자료를 제공함으로서 천문학 등의 자연과학의 연구에도 활용이 가능하다. 국왕의 진료기록 등은 의학사(醫學史)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이렇게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법제, 사회, 자연 현상, 인사, 국왕과 관료의 동정, 국정 논의 등 광범위한 기록이 들어있어 가히 한국학 연구의 보고라 할 수 있다.[7] 또한
  1. "승정원일기의 작성", 승정원일기 소개 『승정원일기』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승정원일기의 작성방식", 승정원일기 소개 『승정원일기』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승정원일기의 작성방식", 승정원일기 소개 『승정원일기』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승정원일기의 작성", 승정원일기 소개 『승정원일기』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승정원일기의 작성", 승정원일기 소개 『승정원일기』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승정원일기의 사료적 가치", 승정원일기 소개 『승정원일기』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승정원일기의 사료적 가치", 승정원일기 소개 『승정원일기』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