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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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박사가 1890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시민권을 취득한 지 131년째가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제1회 미주 한인 시민권의 날(Korean American Citizenship Day)’ 행사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미디어시에 위치한 서재필기념관에서 열렸다.

서재필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는 서재필기념재단(회장 최정수)은 지난해 마무리된 기념관 재단장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날을 역사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국내외 여러 인사들과 함께 노력해 왔다.

최정수 서재필기념재단 회장에게 ‘미주 한인 시민권의 날’ 선언서를 전달하는 미디어시장 그 결과, 펜실베이니아주 하원은 지난 6월 16일에 크리스토퍼 퀸, 스티븐 말라가리, 토드 스테판스, 브라이언 커틀러, 패티 김 의원 등이 주도한 선언문을 채택, 6월 19일을 ‘미주 한인 시민권의 날(Korean American Citizenship Day)’로 지정했다.

탐 울프 펜실베이니아주지사, 메리 게이 스캔런 연방 하원의원, 데이비드 오 필라델피아시의원과 서재필기념관이 속한 델라웨어 카운티, 어퍼 프라비던스 타운쉽, 미디어시 등 총 7개 기관에서 ‘미주 한인 시민권의 날’을 축하하는 결의안 또는 선언서를 채택했다.

이날 기념행사에는 이종섭 주필라델피아출장소장, 앤디 김 미 연방 하원의원을 비롯해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 등 미 정치권 인사들과 필라델피아, 남부뉴저지, 델라웨어주 한인회, 재향군인회지부 등 한인단체와 아시안연합단체 관계자 등 120명이 참석했다.

현재 미국 한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취업 희망자 102명이 미국 상선을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1903년 1월 13일을 미국 이민의 효시로 기억하고 있으며, 2005년 미 연방의회는 이날을 ‘미주 한인의 날(The Korean American Day)’로 제정해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서재필 박사는 이보다 훨씬 전인 1890년 6월 19일에 미국시민권을 취득했으므로 실제로는 이날이 ‘미주 한인 이민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서재필기념재단의 설명이다.

최정수 서재필기념재단 회장은 “‘미주 한인 시민권의 날’을 기념하는 첫 행사는 펜실베이니아주 지역 행사로 열리지만, 한인 이민사에 중요한 날인만큼 차츰 전국적인 행사로 발전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서재필 박사의 일생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서 1882년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했다. 개화사상에 눈을 뜬 서재필은 1884년 12월에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삼일천하’로 끝났고 주역들은 역적이 됐다.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 미국행 배를 타고 1885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만난 독지가 존 홀렌백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의 해리힐맨고교를 다녔다.

졸업 후 워싱턴으로 이동한 서재필은 1889년 컬럼비안대(현 조지워싱턴대)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해 1892년 졸업했고, 인턴을 거쳐 이듬해 한국인 최초로 의사 면허를 얻고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했다.

조선정부로부터 사면이 된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해서 독립신문을 창간, 민주주의와 독립의식 고취에 힘썼으며, 독립문 건립과 만민공동회 개최 등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수구세력과 일본·러시아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1898년 5월 다시 한국을 떠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었고,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함께 4월 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열어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미국인들을 규합해 전 세계 23개 지부에 2만여 회원을 거느린 ‘한국친우회’를 만들었고, 3년간 전국을 다니며 미국인 10만여명을 대상으로 300여회의 연설을 했다. 영문 월간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해 일제의 만행과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고, 1922년 워싱턴 군축회의와 1925년 호놀룰루 범태평양회의에도 참석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훗날 한국독립의 밑거름이 됐다.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미국-스페인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미육군군의관으로 입대했고, 1942년에는 미군 징병의무관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미국에서 사회참여에도 헌신했다. 1905년 문방구 사업에 뛰어든 이후 70여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크게 성공할 무렵에는 로타리클럽, 프리메이슨 및 미국안보동맹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병리학자로서도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의사로서 주민건강을 위해 특집 칼럼을 규칙적으로 투고하는 등 지역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해방 직후엔 미군정 최고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돼 한미 양국을 위해 일했으며, 1951년 1월 5일 미국에서 영면했다.

이러한 서재필의 미국시민으로서의 모범은 미국정부 등으로부터 인정받게 돼 1945년 1월에는 미 의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미디어시는 1975년 서재필기념비 건립을 위해 로즈트리 파크 부지 일부를 무상으로 내놓았고, 2008년에는 워싱턴D.C.에 한국인 최초로 서재필 동상이 세워졌다. 2021년 5월에는 미국성서공회가 성경을 중심으로 미국의 자유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미국인 22명을 전시하기 위해 개관한 ‘페이스 앤 리버티 디스커버리 박물관(Faith and Liberty Discovery Center)’에 서재필 박사가 포함돼 그의 기록들이 전시되고 있다. 한국정부는 1977년 서재필 박사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고, 1994년 4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