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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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5일 (화) 11:54 판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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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師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영문명칭 Stele for Great Master Bogwang from Bogwangsa Temple Site, Buyeo
한자 扶餘 普光寺址 大普光禪師碑
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07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찬자 위소(危素)
서자 양지(楊池)
각자 회정(懷淨), 이충언(李忠言)
서체 해서(楷書)
승려 충감(冲鑑)
건립연대 1358년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보광사지(普光寺址)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승려 원명국사 충감(圓明國師 冲鑑, 1275-1339)탑비.

내용

개요

높이 약 2.6m. 이 비는 현재 귀부(龜趺)이수(螭首)는 없고, 비몸만 남아있다. 비몸의 가장자리는 덩굴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러 새겼다. 석재는 편마암이고 윗쪽의 양끝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비문은 두 차례에 걸쳐서 새겨졌는데 앞면은 1358년(공민왕 7) 건립 당시 새겼고, 뒷면은 1750년(영조 26)에 추가했다.[1] 비의 앞면 제일 윗부분에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라는 10자의 전액(篆額)이 있고 비의 제목은 "고려임주대보광선사중창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創碑)"로 되어 있다.[2]

비문은 충감의 제자이자 당시 선원사(禪源寺) 주지였던 굉연(宏演)이 원나라에서 문장가로 이름높았던 위소(危素)에게 부탁해서 지은 것이다. 양지(楊池)가 썼으며, 주백기(周伯琦)전액을 썼다.[3][4] 비의 상태는 전체적으로 균열이 많으며 지대석(址臺石)[5]과 비몸은 시멘트로 접착하였고 비몸에도 시멘트로 보수한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 고려시대 후기의 비석 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6]

1963년 보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비문

전면

비문 전면은 원명국사 충감의 생애와 보광사(普光寺)의 중창과정 두 부분으로 기술되어있다.[7] 충감은 선원사(禪源寺) 출신으로 중국의 강남지방에 유학한 후 간화선의 대가로 이름이 높던 몽산(蒙山) 덕이(德異)의 제자 철산(鐵山) 소경(紹瓊)과 함께 귀국하여 간화선(看話禪)[8] 풍을 널리 퍼뜨렸고, 선종 승려들의 생활규범을 정리한 『선문청규(禪門淸規)』의 보급에도 힘썼다. 1336년(충숙왕 5)에 그가 개경을 떠나 보광사로 은퇴하자 지방관과 충감의 가족들이 물자를 시주하여 보광사를 크게 중창하였고, 이후 이 곳에는 그의 문도들이 주석하게 되었다.[9]

후면

뒷면의 추가된 기록에는 임진왜란 때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기록을 적은 비도 알아볼 수 없으므로 주지인 능일(能一)이 고쳐 새긴다고 되어있다.

Quote-left.png 국사께서 머무실 때 이 절을 창건하였는데 임진년의 병란에 건물이 모두 불탈 때에 비를 보관하고 있던 건물도 잿더미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멸이 심하여 글씨를 누군들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국사의 행적이 사라져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주지인 석(釋) 능일(能一)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장인들을 모아 비석의 기록을 새롭게 하니 천년 전의 옛 자취가 어제 일처럼 분명하게 되었다. 아아, 아름답도다. Quote-right.png
출처: 한기문, 『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한국국학진흥원, 2014, 37쪽.[10]



비문 보러가기
한기문, 『한국금석문집성 34: 고려18 비문18』, 한국국학진흥원, 2014.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34: 고려18 비문1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충감 A는 B를 위한 비이다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위소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양지 A는 B가 비문을 썼다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이충언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부여 보광사 A는 B에 있었다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부여 보광사지 A는 B에 있었다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국립부여박물관 A는 B에 있다
부여 보광사지 부여 보광사 A는 B의 터이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문화재검색』online, 문화재청.
  2.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두산백과』online.
  3. 김응현,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찬자와 서자가 모두 원말의 문한관이자 당대의 지성이었다는 점에서 려원 문화교류가 승려와 문인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기문, 『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한국국학진흥원, 2014, 30쪽. 온라인 참조:"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5. 건축물을 세우기 이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6.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두산백과』online.
  7. "보광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간화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보광사대보광선사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10.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 한국금석문집성34: 고려18 비문18, 『KR-pia - 한국의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