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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한자 표준음에 관한 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 표준음에 관한 책이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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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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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 표준음에 관한 책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세종]]의 명에 따라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최항]](崔恒, 1409~1474),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이 편찬에 참여했고, 1448년 (세종 30)에 6권 6책의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중국의 표준음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음’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 표준음에 관한 책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세종]]의 명에 따라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최항]](崔恒, 1409~1474),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이 편찬에 참여했고, 1448년 (세종 30)에 6권 6책의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중국의 표준음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음’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최초로 한글의 음가를 이용해 한자음을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훈민정음]]』과 함께 국어 연구 자료로서 중요성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과 음운체계 연구에도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책은 당시 음운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2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REF>
 
이 책은 최초로 한글의 음가를 이용해 한자음을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훈민정음]]』과 함께 국어 연구 자료로서 중요성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과 음운체계 연구에도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책은 당시 음운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2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REF>
  
====운서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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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서에 대해서===
 
본래 운서(韻書)는 한자의 음을 연구하는 것으로, 한자 음운학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기원은 중국 남북조시대(ACE3~6세기)로 특히 [[남조]](南朝)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자음(字音)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방법이 발달하였다. 시를 지을 때 운율(韻律)에 민감하였던 남조 사람들은 인도음운학의 영향을 입어서 자음의 사성(四聲)을 구분하여 의식하고, 또 한자들을 운별(韻別)로 분류, 정리하는 법을 마련하였다. 그 법을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운서가 발간되었고, 수(隋, 581~618)나라 시기에 이르면 [[육법언]](陸法言)등 여러 학자들이 여러 종류의 운서를 종합하여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이 바로 중국 운서의 대종이라 일컫는 『[[절운]](切韻), (601년, 간행됨)』이다. 그 후 당대(唐代,618~907) 이후 『[[절운]](切韻)』을 증보하거나 새로운 운서를 편찬하는 일이 계속되어 『당운(唐韻)』이 만들어졌으며, 송(宋, 960~1279)시기에는 『광운(廣韻)』, 『[[예부운략]](禮部韻略)』, 『집운(集韻)』, 『고금운회(古今韻會)』 등이 편찬 되었다. 원(元, 1279~1368)시기에는 『거요(擧要)』, 『중원음운(中原音韻)』등이 있으며, 명대(明, 1368~1644) 초기에는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이 나왔다. 이러한 중국의 음운학의 연구와 그와 관련된 서책이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짐작 할 수 있겠지만, 확실한 시기는 언제인지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고려 중기에는 문인들이 한시를 짓는 일이 매우 일상적이었고, 조선 태종(太宗,1400~1418)시기에는 『[[동국약운]](東國略韻)』이 간행 되었고, 조선 전반기에 『[[예부운략|예부운략(禮部韻略)]]』이 간행되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世宗,1418~1450)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운학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었고, 그 보필자였던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등은 운학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전래된 운학과 세종 및 집현전 학자들이 모여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훈민정음_해례본|훈민정음 해례본]](1446, 간행됨)』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자음에 대한 재정립 또한 필요하다고 하여 『동국정운(1447, 간행됨)』을 만들게 된 것이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04 운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일.</REF>  
 
본래 운서(韻書)는 한자의 음을 연구하는 것으로, 한자 음운학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기원은 중국 남북조시대(ACE3~6세기)로 특히 [[남조]](南朝)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자음(字音)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방법이 발달하였다. 시를 지을 때 운율(韻律)에 민감하였던 남조 사람들은 인도음운학의 영향을 입어서 자음의 사성(四聲)을 구분하여 의식하고, 또 한자들을 운별(韻別)로 분류, 정리하는 법을 마련하였다. 그 법을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운서가 발간되었고, 수(隋, 581~618)나라 시기에 이르면 [[육법언]](陸法言)등 여러 학자들이 여러 종류의 운서를 종합하여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이 바로 중국 운서의 대종이라 일컫는 『[[절운]](切韻), (601년, 간행됨)』이다. 그 후 당대(唐代,618~907) 이후 『[[절운]](切韻)』을 증보하거나 새로운 운서를 편찬하는 일이 계속되어 『당운(唐韻)』이 만들어졌으며, 송(宋, 960~1279)시기에는 『광운(廣韻)』, 『[[예부운략]](禮部韻略)』, 『집운(集韻)』, 『고금운회(古今韻會)』 등이 편찬 되었다. 원(元, 1279~1368)시기에는 『거요(擧要)』, 『중원음운(中原音韻)』등이 있으며, 명대(明, 1368~1644) 초기에는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이 나왔다. 이러한 중국의 음운학의 연구와 그와 관련된 서책이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짐작 할 수 있겠지만, 확실한 시기는 언제인지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고려 중기에는 문인들이 한시를 짓는 일이 매우 일상적이었고, 조선 태종(太宗,1400~1418)시기에는 『[[동국약운]](東國略韻)』이 간행 되었고, 조선 전반기에 『[[예부운략|예부운략(禮部韻略)]]』이 간행되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世宗,1418~1450)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운학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었고, 그 보필자였던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등은 운학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전래된 운학과 세종 및 집현전 학자들이 모여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훈민정음_해례본|훈민정음 해례본]](1446, 간행됨)』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자음에 대한 재정립 또한 필요하다고 하여 『동국정운(1447, 간행됨)』을 만들게 된 것이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04 운학]",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일.</REF>  
  
====동국 정운의 편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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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 정운의 편찬과정===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 9인이다. 이들의 분담업무 중 감장(監掌)은 [[동궁]](東宮)에서 하며 그 보좌로는 [[진양대군]]과 [[안평대군]], 주무(主務)는 [[신숙주]]와 [[성삼문]] 등이 일을 맡았다. 우리나라 한자음 중심으론 [[최항]]과 [[박팽년]], 중국음에 대한 자문은 [[조변안]]과 [[김증]]이 하였다. 교정과 정리는 [[강희안]]이 하였다. 『동국정운』은 [[신숙주]]가 쓴 서문만이 전해 오다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첫째 권과 여섯째 권의 두 책이 발견되었다. 이들 원본은 현재 [[간송문고]]에 있다. 그 뒤 중종(中宗,1506~1544 ) 때의 문신인 [[심언광]](沈彦光)의 집안에 전해 오던 6권 6책의 전질이 1972년에 강릉 [[심교만]](沈敎萬)의 집에서 발견되어 현재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송문고본은 전 6권 가운데 두 책만이 남아 있으나, 권수에 선사지기(宣賜之記)가 날인되어 있고 제목이 있는 표지도 본래의 것으로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판심제(版心題)는 ‘正韻(정운)’이라고 되어 있다. 활자 중 본문의 한글과 한자 대자(大字)는 목활자(木活字)이고, 소자(小字)와 서문의 대자는 초주(初鑄) 갑인자(甲寅字)이다. 자체(字體)는 본문 대자가 [[세조|수양대군]]의 글씨와 비슷하고, 묵개(墨蓋)의 음각한 글이 [[안평대군]]의 글씨와 비슷하나 편찬자의 한 사람인 [[강희안]]의 필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건국대학교 소장본은 간송문고본과 같은 인쇄본인데, 선장본(線裝本)을 포배장(包背裝)으로 개장하면서 책의 위와 아래를 약간 절단하였고, ‘선사지기’가 없으며, 제전(題箋) 아래에 차례를 나타내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묵서(墨書)로 가필한 점이 다르다. 간송미술관 소장본 『동국정운』은 1958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하였고, 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1973년에 영인하였다.  <REF>유창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294 동국정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일.</REF>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 9인이다. 이들의 분담업무 중 감장(監掌)은 [[동궁]](東宮)에서 하며 그 보좌로는 [[진양대군]]과 [[안평대군]], 주무(主務)는 [[신숙주]]와 [[성삼문]] 등이 일을 맡았다. 우리나라 한자음 중심으론 [[최항]]과 [[박팽년]], 중국음에 대한 자문은 [[조변안]]과 [[김증]]이 하였다. 교정과 정리는 [[강희안]]이 하였다. 『동국정운』은 [[신숙주]]가 쓴 서문만이 전해 오다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첫째 권과 여섯째 권의 두 책이 발견되었다. 이들 원본은 현재 [[간송문고]]에 있다. 그 뒤 중종(中宗,1506~1544 ) 때의 문신인 [[심언광]](沈彦光)의 집안에 전해 오던 6권 6책의 전질이 1972년에 강릉 [[심교만]](沈敎萬)의 집에서 발견되어 현재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송문고본은 전 6권 가운데 두 책만이 남아 있으나, 권수에 선사지기(宣賜之記)가 날인되어 있고 제목이 있는 표지도 본래의 것으로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판심제(版心題)는 ‘正韻(정운)’이라고 되어 있다. 활자 중 본문의 한글과 한자 대자(大字)는 목활자(木活字)이고, 소자(小字)와 서문의 대자는 초주(初鑄) 갑인자(甲寅字)이다. 자체(字體)는 본문 대자가 [[세조|수양대군]]의 글씨와 비슷하고, 묵개(墨蓋)의 음각한 글이 [[안평대군]]의 글씨와 비슷하나 편찬자의 한 사람인 [[강희안]]의 필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건국대학교 소장본은 간송문고본과 같은 인쇄본인데, 선장본(線裝本)을 포배장(包背裝)으로 개장하면서 책의 위와 아래를 약간 절단하였고, ‘선사지기’가 없으며, 제전(題箋) 아래에 차례를 나타내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묵서(墨書)로 가필한 점이 다르다. 간송미술관 소장본 『동국정운』은 1958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하였고, 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1973년에 영인하였다.  <REF>유창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294 동국정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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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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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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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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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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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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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논문
 
*논문
 
** 이준환, 「中世·近代·開化期의 韻書 및 字書 편찬의 역사」, 『東洋學』 vol 57, 2014, 159~186쪽.
 
** 이준환, 「中世·近代·開化期의 韻書 및 字書 편찬의 역사」, 『東洋學』 vol 57, 2014, 159~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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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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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창섭]]

2017년 5월 19일 (금) 11:19 판

동국정운
한글팀 동국정운 03 동국정훈-간송소장 권(1-6) 2014년 국보 동산 앱사진.jpg
한자명칭 東國正韻
영문명칭 The first book about standard sounds of Chinese. Compiled and published to unify standard sounds of Chinese used in Korea.
작자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
간행시기 1447(세종29)
소장처 건국대학교박물관
문화재지정사항 국보 제142호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1.9×19.8㎝
판본 목활자본(大字), 금속활자본(小字)
수량 6책
표기문자 한자, 한글


정의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 표준음에 관한 책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 표준음에 관한 책이다. 당시 혼란스럽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되었다. 세종의 명에 따라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최항(崔恒, 1409~1474),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등이 편찬에 참여했고, 1448년 (세종 30)에 6권 6책의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중국의 표준음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으로, ‘동국정운’이란 ‘우리나라의 바른음’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최초로 한글의 음가를 이용해 한자음을 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훈민정음』과 함께 국어 연구 자료로서 중요성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자음의 음운체계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창제 배경과 음운체계 연구에도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책은 당시 음운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1]

운서에 대해서

본래 운서(韻書)는 한자의 음을 연구하는 것으로, 한자 음운학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기원은 중국 남북조시대(ACE3~6세기)로 특히 남조(南朝)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자음(字音)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방법이 발달하였다. 시를 지을 때 운율(韻律)에 민감하였던 남조 사람들은 인도음운학의 영향을 입어서 자음의 사성(四聲)을 구분하여 의식하고, 또 한자들을 운별(韻別)로 분류, 정리하는 법을 마련하였다. 그 법을 바탕으로 여러 종류의 운서가 발간되었고, 수(隋, 581~618)나라 시기에 이르면 육법언(陸法言)등 여러 학자들이 여러 종류의 운서를 종합하여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이 바로 중국 운서의 대종이라 일컫는 『절운(切韻), (601년, 간행됨)』이다. 그 후 당대(唐代,618~907) 이후 『절운(切韻)』을 증보하거나 새로운 운서를 편찬하는 일이 계속되어 『당운(唐韻)』이 만들어졌으며, 송(宋, 960~1279)시기에는 『광운(廣韻)』, 『예부운략(禮部韻略)』, 『집운(集韻)』, 『고금운회(古今韻會)』 등이 편찬 되었다. 원(元, 1279~1368)시기에는 『거요(擧要)』, 『중원음운(中原音韻)』등이 있으며, 명대(明, 1368~1644) 초기에는 『홍무정운(洪武正韻)』 등이 나왔다. 이러한 중국의 음운학의 연구와 그와 관련된 서책이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짐작 할 수 있겠지만, 확실한 시기는 언제인지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고려 중기에는 문인들이 한시를 짓는 일이 매우 일상적이었고, 조선 태종(太宗,1400~1418)시기에는 『동국약운(東國略韻)』이 간행 되었고, 조선 전반기에 『예부운략(禮部韻略)』이 간행되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世宗,1418~1450)은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운학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었고, 그 보필자였던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등은 운학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전래된 운학과 세종 및 집현전 학자들이 모여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훈민정음 해례본(1446, 간행됨)』이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자음에 대한 재정립 또한 필요하다고 하여 『동국정운(1447, 간행됨)』을 만들게 된 것이다. [2]

동국 정운의 편찬과정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 9인이다. 이들의 분담업무 중 감장(監掌)은 동궁(東宮)에서 하며 그 보좌로는 진양대군안평대군, 주무(主務)는 신숙주성삼문 등이 일을 맡았다. 우리나라 한자음 중심으론 최항박팽년, 중국음에 대한 자문은 조변안김증이 하였다. 교정과 정리는 강희안이 하였다. 『동국정운』은 신숙주가 쓴 서문만이 전해 오다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첫째 권과 여섯째 권의 두 책이 발견되었다. 이들 원본은 현재 간송문고에 있다. 그 뒤 중종(中宗,1506~1544 ) 때의 문신인 심언광(沈彦光)의 집안에 전해 오던 6권 6책의 전질이 1972년에 강릉 심교만(沈敎萬)의 집에서 발견되어 현재 건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송문고본은 전 6권 가운데 두 책만이 남아 있으나, 권수에 선사지기(宣賜之記)가 날인되어 있고 제목이 있는 표지도 본래의 것으로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판심제(版心題)는 ‘正韻(정운)’이라고 되어 있다. 활자 중 본문의 한글과 한자 대자(大字)는 목활자(木活字)이고, 소자(小字)와 서문의 대자는 초주(初鑄) 갑인자(甲寅字)이다. 자체(字體)는 본문 대자가 수양대군의 글씨와 비슷하고, 묵개(墨蓋)의 음각한 글이 안평대군의 글씨와 비슷하나 편찬자의 한 사람인 강희안의 필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건국대학교 소장본은 간송문고본과 같은 인쇄본인데, 선장본(線裝本)을 포배장(包背裝)으로 개장하면서 책의 위와 아래를 약간 절단하였고, ‘선사지기’가 없으며, 제전(題箋) 아래에 차례를 나타내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묵서(墨書)로 가필한 점이 다르다. 간송미술관 소장본 『동국정운』은 1958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영인하였고, 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본은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1973년에 영인하였다. [3]

지식 관계망

겔러리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세종 동국정운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동국정운 편찬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신숙주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최항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성삼문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박팽년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이개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강희안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이현로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조변안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김증 동국정운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집현전 동국정운 편찬 A는 B를 주관하였다
신숙주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최항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성삼문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박팽년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이개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강희안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이현로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조변안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김증 동국정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육법언 절운 A는 B를 저술하였다 601년
당운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광운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부운략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집운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금운희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거요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중원음운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홍무정운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동국약운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A는 B와 관련이 있다
통문관 동국정운 간송본 A는 B를 영인하였다 1958년
동국정운 간송본 간송문고 A는 B에 포함된다
간송문고 전형필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간송미술관 전형필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심언광 동국정운 건국대 소장본 A는 B를 소장하였다
심언광 심교만 A는 B의 조상이다
심교만 동국정운 건국대 소장본 기증 A는 B에 참여하였다 1972년
건국대학교 박물관 동국정운 건국대 소장본 기증 A는 B의 기증처이다 1972년
동국정운 건국대 소장본 건국대학교 박물관 A는 B에 보관되었다
건국대학교 출판부 동국정운 건국대 소장본 A는 B를 영인하였다 1973년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447년 동국정운이 간행되었다
1958년 동국정운 간송본은 통문관에서 영인되었다
1972년 심교만이 동국정운 건국대 소장본을 건국대학교에 기증했다
1973년 동국정운 건국대 소장본은 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40746 127.074664 건국대학교 도서관에서 동국정운을 소장하였다
37.3537 126.59486 간송미술관에서 동국정운을 소장하였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2쪽. 해설문 속의 각종 링크 정보는 기록유산스토리사업팀에서 추가.
  2. "운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일.
  3. 유창균, "동국정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4월 1일.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이준환, 「中世·近代·開化期의 韻書 및 字書 편찬의 역사」, 『東洋學』 vol 57, 2014, 159~186쪽.
    • 이현선, 「東國正韻 漢字音 淵源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차익종, 「《동국정운》복수음의 문헌 속 단일화 양상」, 『국어학』, Vol 77, 2016, 33~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