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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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德壽宮)
대표명칭 덕수궁
한자표기 德壽宮
유형 유적
시대 조선
지정번호 사적 제124호
지정일 1963년 1월 18일


정의

덕수궁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이다.

내용

건립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다시 바꾸었다.[1]

구조

소속 전각

덕수궁은 원래 내부에 전각이 많지 않아 궁궐의 풍모를 갖추지 못했으나 1897년(광무 1)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아관파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2]

변화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이후 궁을 중건하면서 궁의 배치가 크게 변화되었다.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화재 뒤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3]

주요 건물

중화전

고종이 1897년에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여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4]

중화문

1902년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만들어 새웠으며 본래 중화문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있다.[5]

함녕전

1897년 건립되었으며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4월 함녕전온돌 수리 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함녕전은 같은 해 12월에 중건되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6]

석조전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건물 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 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7]

정관헌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동서양 양식을 모두 갖춘 점이 특징이다. 고종이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이며 한때 이곳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8]

석어당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중 의주에서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였다.[9]

덕흥전

덕홍전은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한 건물로,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10]

즉조당

준명당(俊明堂)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15대 광해군(光海君)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손실되었는데 그해에 다시 석어당, 함녕전과 같이 중건하였다.[11]

대한문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 앉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으며,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 복원한 것이다.[12]

중명전

1897년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로 계획되었으며, 건립 시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다. 1904년 대화재로 황궁이 전소되자 고종이 이 권역으로 넘어와 수옥헌을 편전이나 알현실로 사용하였다. 이때 황족의 거처가 구비되고 의정부 건물이 신설되는 등 수옥헌의 권역이 확대되었다. 1905년에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수옥헌을 에워싸고 강압적으로 조약 체결을 강요하여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고, 이듬해부터 중명전으로 불리게 되었다.[1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덕수궁 중화전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정관헌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돈덕전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즉조당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석어당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경효전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준명전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흠문각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함녕전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석조전 A는 B가 있는 곳이다
덕수궁 조선 선조 A는 B에 의해 건립되었다
덕수궁 고종 A는 와 관계가 있다
덕수궁 아관파천 A는 B와 관계가 있다
함녕전 고종 A는 B와 관계가 있다
중명전 을사늑약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사태를 끝내고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1905년 덕수궁에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1907년 덕수궁에서 고종 순종에게 양위하였다.

주석

  1. 김동현, "덕수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동현, "덕수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동현, "덕수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5.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6.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7.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8.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9.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10.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11.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12.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13. "주요건물현황", 덕수궁 이야기, 『문화재청 덕수궁』online,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안창모,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동녘, 2009.
    • 김영태,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태믹스, 2015.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