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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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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조선 철종|철종]] 12) [[김정호|김정호(金正浩)]]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조선 고종|고종]] 1)에 재간한 분첩절철식(粉帖折疊式)의 전국 지도첩.<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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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조선 철종]] 12) [[김정호|김정호(金正浩)]]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조선 고종|고종]] 1)에 재간한 분첩절철식(粉帖折疊式)의 전국 지도첩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  
  
 
=='''내용'''==
 
=='''내용'''==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으로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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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  
  
 
===대동여지도 서문===
 
===대동여지도 서문===
대동여지도 서문에 해당하는 지도유설에서는 지도 제작의 목적과 효용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국방상의 요충지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야 하므로 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또 세상이 어지러우면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들을 제거하는 데 지도가 쓰이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지도가 소용된다고 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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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서문에 해당하는 지도유설에서는 지도 제작의 목적과 효용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방상의 요충지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파악해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야 하므로 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또 세상이 어지러우면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들을 제거하는 데 지도가 쓰이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지도가 소용된다고 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대동여지도의 특징===
 
===대동여지도의 특징===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하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지도의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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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지도의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추구했던 [[청구도]]와는 달리 그는 이번에는 지리지의 내용을 배제하고 자연지형과 지리정보만으로 구성되는 전국지도를 구상하였다. 또 산줄기를 아예 그리지 않았던 청구도와는 다르게 국토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는 유기체적 국토관에 입각하여 크고 작은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뻗어 나오도록 구성하였다. 형식적으로도 색인지도를 두어 찾아보기 기능이 강했던 청구도와 달리 이어보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풍식의 첩 형태를 취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br/> 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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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지지(地誌)를 결합했던 [[청구도]]와는 달리 이번에는 지리지의 내용을 배제하고 자연지형과 지리정보만으로 구성되는 전국지도를 구상하였다. 또 산줄기를 아예 그리지 않았던 청구도와는 다르게 국토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는 유기체적 국토관에 입각하여 크고 작은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뻗어 나오도록 구성하였다. 형식적으로도 색인지도를 두어 찾아보기 기능이 강했던 청구도와 달리 이어보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풍식의 첩 형태를 취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br/> 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다.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br/>
  
그리고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대동여지도 도성도|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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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그 중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대동여지도 도성도|「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ref>"[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21 김정호 (金正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의의와 평가===
 
===의의와 평가===
지도의 제작이란 측면에서 [[김정호]]의 궁극적인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지도책의 제작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희망은 지도의 제작뿐만 아니라 이용과 교정 및 필사 부분까지 세밀하게 고려한 『[[청구도]]』에서부터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한 번에 많이 찍어낼 수 있는 목판본 『대동여지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실현되었다. [[김정호]]에게 지도의 정확성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항시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편리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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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제작이란 측면에서 [[김정호]]의 궁극적인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지도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희망은 지도의 제작뿐만 아니라 이용과 교정 및 필사 부분까지 세밀하게 고려한 『[[청구도]]』에서부터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한 번에 많이 찍어낼 수 있는 목판본 『대동여지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실현되었다. [[김정호]]에게는 지도의 정확성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항시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편리성이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br/>
평면 위의 직선거리가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구불구불 실제로 가는 거리 정보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삼각측량이나 경위도 측정에 기초하여 제작된 근대지도의 정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김정호]]의 지도에는 현재의 10만 : 1 도로지도 등 많이 이용되는 것을 전제로 제작된 근·현대의 대중적 지도책에 담겨 있는 아이디어가 거의 모두 담겨 있다. 이용의 문제만을 고려한다면 목판본의『대동여지도』 22첩은 지도사적 가치로 보아 이미 근대를 뛰어넘은 지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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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는 평면 위의 직선거리가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구불구불 실제로 가는 거리 정보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하였다. 때문에 삼각측량이나 경위도 측정에 기초하여 제작된 근대지도의 정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김정호]]의 지도에는 현재의 10만 : 1 도로지도 등 이용도가 높은 근·현대의 대중적 지도책에 담겨 있는 아이디어가 거의 모두 반영되어 있다. 활용도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목판본의『대동여지도』 22첩은 지도사적 가치에서 이미 근대를 뛰어넘은 지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4266 대동여지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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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C040/C040.htm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김태)"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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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53359&cid=58246&categoryId=58246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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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7일 (수) 00:12 기준 최신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대표명칭 대동여지도
한자표기 大東輿地圖
유형 지도첩
저자 김정호
편자 김정호
저술시기 1861년
시대 조선
수량 22첩
판본 목판본
소장처 서울역사박물관,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청구기호 보물
지정번호 제850-1호
지정일 1985년 8월 9일



정의

1861년(조선 철종 12) 김정호(金正浩)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고종 1)에 재간한 분첩절철식(粉帖折疊式)의 전국 지도첩이다.[1]

내용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목판본의 『대동여지도』 22첩(帖)은 김정호가 1861년에 편찬·간행하고 1864년에 재간한 22첩의 병풍식(또는 절첩식) 전국 지도첩이다. 김정호는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 120리 22층으로 나누고 동서 80리 간격 19판(版)으로 각 층에 해당하는 지역의 지도를 각각 1권의 책으로 접어서 엮었다. 1첩 한 면의 남북 길이가 약 30㎝이기 때문에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4.0m에 이르는 초대형 조선전도가 된다.[2]

대동여지도 서문

대동여지도 서문에 해당하는 지도유설에서는 지도 제작의 목적과 효용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방상의 요충지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파악해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야 하므로 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또 세상이 어지러우면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들을 제거하는 데 지도가 쓰이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지도가 소용된다고 하였다.[3]

대동여지도의 특징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전국을 동서와 남북 각각 80리와 120리의 동일 간격으로 나누어 최북단의 1층부터 최남단의 22층까지 22첩으로 분리 수록하여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지도의 크기 때문에 휴대와 열람에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책으로 제본된 이전 시기의 지도와는 달리 첩을 펼쳐서 상하·좌우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지도로서의 특수성이 있다.[4]

지도와 지지(地誌)를 결합했던 청구도와는 달리 이번에는 지리지의 내용을 배제하고 자연지형과 지리정보만으로 구성되는 전국지도를 구상하였다. 또 산줄기를 아예 그리지 않았던 청구도와는 다르게 국토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는 유기체적 국토관에 입각하여 크고 작은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뻗어 나오도록 구성하였다. 형식적으로도 색인지도를 두어 찾아보기 기능이 강했던 청구도와 달리 이어보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풍식의 첩 형태를 취하였다.[5]
또한,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다.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6]

그리고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그 중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7]

의의와 평가

지도의 제작이란 측면에서 김정호의 궁극적인 목표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지도책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희망은 지도의 제작뿐만 아니라 이용과 교정 및 필사 부분까지 세밀하게 고려한 『청구도』에서부터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한 번에 많이 찍어낼 수 있는 목판본 『대동여지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실현되었다. 김정호에게는 지도의 정확성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항시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편리성이었다.[8]
『대동여지도』는 평면 위의 직선거리가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구불구불 실제로 가는 거리 정보를 기초로 지도를 제작하였다. 때문에 삼각측량이나 경위도 측정에 기초하여 제작된 근대지도의 정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김정호의 지도에는 현재의 10만 : 1 도로지도 등 이용도가 높은 근·현대의 대중적 지도책에 담겨 있는 아이디어가 거의 모두 반영되어 있다. 활용도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목판본의『대동여지도』 22첩은 지도사적 가치에서 이미 근대를 뛰어넘은 지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9]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대동여지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대동여지도 청구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청구도 김정호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대동여지도 서울역사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대동여지도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대동여지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 [K-HERITAGE]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대동여지도 목판(게시일: 2015년 3월 3일)

주석

  1.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2.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3.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5.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7.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9.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10.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11.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대동여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6년 9월 6일.
    • "김정호 (金正浩)",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유용한 정보

  1. "김정호를 기억한 사람들", 김정호의 꿈, 대동여지도의 탄생,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