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초상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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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남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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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출생
 
*출생
남구만은 1629년(인조 7)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구만의 호는 약천(藥泉),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부친은 남일성(南一星), 모친은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이다. 20세에 봉사(奉事) 정수의 딸과 혼인하였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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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은 1629년(인조 7)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구만의 호는 약천(藥泉),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부친은 남일성(南一星), 모친은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이다. 20세에 봉사(奉事) 정수의 딸과 혼인하였다. 1711년(숙종 37)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교유관계
 
*교유관계
남구만과 가장 교류가 많았던 유생으로는 [[박세당 | 서계 박세당]]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최석정 | 최석정(崔錫鼎)]], [[최규서 | 최규서(崔奎瑞)]], [[이사평 | 이사명(李師命)]], [[최석향 | 최석항(崔錫恒)]], [[정제두 | 정제두(鄭濟斗)]] 등 당대의 명사들이 그의 문인으로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소론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여 학계와 정치계에서 활약하였다. <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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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과 가장 교류가 많았던 유생으로는 [[박세당 | 서계 박세당]]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최석정 | 최석정(崔錫鼎)]], [[최규서 | 최규서(崔奎瑞)]], [[이사명 | 이사명(李師命)]], [[최석향 | 최석항(崔錫恒)]], [[정제두 | 정제두(鄭濟斗)]] 등 당대의 명사들이 그의 문인으로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소론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여 학계와 정치계에서 활약하였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죽음
 
1711년(숙종 37) 약천이 83세의 나이로 졸하자 [[조선 숙종 | 숙종]]은 애통의 교서를 내리고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으며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담군(擔軍)을 일체 관에서 지급하여 그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그가 별세할 당시에는 그의 세력인 소론 세력이 약세를 보였던 시기였으며 이후 소론 정권이 득세한 1722년(경종 2)에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고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정치활동===
 
===정치활동===
남구만이 비록 요직을 두루 거치고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그 시기는 조선 시대 어느 때보다도 당쟁이 치열하고 논란이 많던 시기였던 만큼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벼슬길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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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의 논객으로 정계에 입문하다====
<!--첫 번째 시기는 29세(1657)부터 46세(1674)까지로, 약천이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경륜을 쌓아가고 자신의 정책과 사상을 확립해 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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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1656년)에 별시 문과 을과에 합격하여 이후 [[청요직 | 청요직(淸要職)]]으로 순조롭게 진출하였다. 30세에 [[윤선도 | 윤선도(尹善道)]]의 국시소(國是疏)가 올라오자 정언으로서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탄핵에 앞장서 서인을 대표하는 논객의 역할을 하였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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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헌의와 국방관의 정립====
23세 7월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곧 이민서(李敏敍) 형제와 교분을 맺게 되었다. 이민서는 당시 영의정이던 [[이경여|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김익희, 이민서 등과 교유하면서 이미 남구만의 학식과 명성이 유림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28세(1656년)에 별시 문과 을과에 합격하여 이후 [[청요직 | 청요직(淸要職)]]으로 순조롭게 진출하였다. 다음해 사서, 정언, 문학 등에 제수되어 경연에 참가하였다가 당시 유림의 종장(宗長)이었던 [[송준길| 송준길(宋浚吉)]]의 인정을 받고 문인(門人)되어 서인들의 사이에서 명망이 높아졌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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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에 호남에 대한 [[대동법 | 대동법(大同法)]] 실시에 대해 헌의하였다. 43세부터 46세까지 4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 정책에 관여하였는데, 특히 시기는 남구만의 국방사상과 역사관이 정립되는 시기이며, 1698년(숙종 24)에 남구만이 [[신전자초방]]의 간행을 건의하는 계기가 되었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서인의 대표 논객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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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격변기 남구만의 처세====
30세에 춘당대(春塘臺)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합격하여 [[조선 효종 | 효종(孝宗)]]에게 특별히 지필묵(紙筆墨)을 하사받고, 효종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상()에 친림(親臨)하는 것을 간언하여 막았다. 이 해에 [[윤선도 | 윤선도(尹善道)]]의 국시소(國是疏)가 올라오자 정언으로서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탄핵에 앞장서 서인을 대표하는 논객의 역할을 하였다. 35세에 호남에 대한 [[대동법 | 대동법(大同法)]] 실시에 대해 헌의하고, 36세에 대사간이 되었으나 [[송시열]]과 대립하는[[김좌명 | 김좌명(金佐明)]]의 파직을 청하다가 체직되었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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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과 서인 주도 정국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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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0년 [[경신환국 |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로 소명을 받고 이어서 부제학, 공조 참의, 동지의금부사,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5월에는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어 보사 원종공신 (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다. 56세에 우의정, 57세에는 좌의정에 오른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국방사상과 역사관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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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슬옥사]]와 노론과의 대립
복직된 43세부터 46세까지 4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 정책에 관여하였는데, 특히 이 시기는 남구만의 국방사상과 역사관이 정립되는 시기로 이 즈음의 저술을 주목해 볼 만하다. 여연(閭延), 자성(慈城), 우예(虞芮), 무창(茂昌) 등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설치하고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의 도로를 개통하여 서북 지방의 실질적인 방어책을 세우고 국경을 확정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주체적인 구토회복(舊土回復) 의식과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정이 무관심 속에 방치해 오던 북변지역을 중시하여,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頭滿江)으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의 국경을 사수해야 한다는 의식하에 수만언에 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북변의 각 읍을 끊임없이 순행하여 민정(民情)을 살피고 군역(軍役)의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이는 1698년(숙종 24)에 남구만이 [[신전자초방]]의 간행을 건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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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은 [[임술옥사 | 임술옥사(壬戌獄事)]]의 고변자인 [[김환 |김환(金煥)]]의 처벌 건과 효종의 세실(世室), 태조(太祖)의 존호 추상 안건에서 [[박세채]], 이상진(李尙眞)과 노선을 같이 하여 젊은 사류의 입장을 지지하였는데, 김환을 옹호하는 [[송시열]] 등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두 번째 시기인 46세(1674)부터 65세(1693)까지는 남구만의 정치적 역량이 가장 잘 발휘된 시기이자 시련과 갈등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남구만은 중앙으로 돌아와 서인의 논객으로 본격적인 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남인과의 격화되는 당쟁으로 몇 차례 유배를 당하고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는 분열 속에서 정치적 갈등을 느끼며 아들의 출사를 극력 만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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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 서인 세력의 몰락
*3차 예송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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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8년 [[장희빈 | 장희빈(張禧嬪)]]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앞세운 남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된다. 이후 삼사(三司)의 구원으로 방환되었다가 다음해 [[기사환국 |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다시 추궁을 받아 강릉(江陵)에 중도부처되고 조카이자 문인(門人)[[박태보 | 박태보(朴泰輔)]]가 장사(杖死)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1675년 [[예송논쟁 | 3차 예송(禮訟)]]발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득세하자 남인과 연계된 종실 [[북창군 이정 |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북선군 이남 |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의 전횡을 경계하고 송준길을 두둔하다가 체직되고, 결성으로 돌아온 뒤 고신(告身)을 빼앗기는 등 이후 몇 년간 침체되는 시련을 겪는다. 50세(1678) 10월 형조 판서, 한성 좌윤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다음해 2월 남인의 영수인 [[운후 | 윤휴(尹鑴)]]와 [[허견 | 허견(許堅)]]을 탄핵하다가 거제(巨濟)로 유배되고 만다.  
+
*[[갑슬환국]]으로서인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다. 
*경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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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서인이 다시 득세하자 남구만은 영의정으로 소명을 받는다.  
52세(1680) [[경신환국 |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로 소명을 받고 이어서 부제학, 공조 참의, 동지의금부사,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5월에는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어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다. 56세에 우의정, 57세에는 좌의정에 오른다. <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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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다
*임술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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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인의 실각과 인현왕후 복위의 과정에서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이 자금을 써서 궁금(宮禁)과 결탁하여 공작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남구만은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다시 노론과 대립하게 된다. 이에 사직과 대명(待命), 영의정 제수가 반복되다가, 결국 68세(1696)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는 재상을 맡지 않았다.<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그즈음 서인들 사이에서는 훈척(勳戚)의 부정과 비리를 두고 젊은 사류들의 반발이 극심하였다. 남구만은 [[임술옥사 | 임술옥사(壬戌獄事)]]의 고변자인 [[김환 |김환(金煥)]]의 처벌 건과 효종의 세실(世室), 태조(太祖)의 존호 추상 등 안건에서 [[박세채]], 이상진(李尙眞)과 노선을 같이 하여 젊은 사류의 입장을 지지하였는데, 김환을 옹호하는 송시열, 김익희 등의 노론과 대립하게 된다. 또한 윤증(尹拯)의 유현(儒賢) 대우 및 복상(卜相)과 관련하여 김수항(金壽恒)과 대립하면서 46차례나 정사(呈辭)하는 등 갈등을 빚었으나 숙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59세 7월 영의정에 제수된다. <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기사환국
 
1688년 [[장희빈 | 장희빈(張禧嬪)]]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앞세운 남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된다. 이후 삼사(三司)의 구원으로 방환되었다가 다음해 [[기사환국 |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다시 추궁을 받아 강릉(江陵)에 중도부처되고 조카이자 문인(門人)인 [[박태보 | 박태보(朴泰輔)]]가 장사(杖死)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세 번째 시기는 갑술환국이 일어난 숙종 20년(1694)부터 졸년(1711)까지이다. 이 시기는 남인이 제거된 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어 약천이 노론으로부터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시기이다.-->
 
*노론과의 대립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서인이 다시 득세하자 남구만은 영의정으로 소명을 받는다. 그러나 남인의 실각과 인현왕후 복위의 과정에서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이 자금을 써서 궁금(宮禁)과 결탁하여 공작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약천은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다시 노론과 대립하게 된다. [[정호 | 정호(鄭澔)]]와[[이현석 |  이현석(李賢錫)]]을 필두로 한 노론은 김춘택을 비호하면서 민암(閔黯)의 옥사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이 엄하지 않다는 이유로 약천을 탄핵하였는데, 특히 동궁의 보호를 명분으로 [[장희재 | 장희재(張希載)]]의 주벌을 반대한 것에 대해 호역(護逆)이라고 비난을 가하며 남인과 연결해 후일을 도모하는 짓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사직과 대명(待命), 영의정 제수가 반복되다가, 결국 68세(1696)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는 재상을 맡지 않았다. <ref>성백효, "[http://db.itkc.or.kr/dir/item?grpId=hj&itemId=BT#/dir/node?grpId=hj&dataId=ITKC_BT_0396A&solrQ=query%E2%80%A0%EC%95%BD%EC%B2%9C%EC%A7%91$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HJ$solr_toalCount%E2%80%A04$solr_curPos%E2%80%A00$solr_solrId%E2%80%A0HJ_ITKC_BT_0396A 약천집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약천집』<sup>online</sup></online></html>,한국고전번역원. </ref>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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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 박세당, 박세체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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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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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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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제, 『약천 남구만 문학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성당제, 『약천 남구만 문학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유용한 자료===
 
===유용한 자료===
*이근호"[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282436 11. 문무를 겸전(兼全)한 정승, 남구만]", 『경기일보』, 작성일: 2016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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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http://www.kyeonggi.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282436 문무를 겸전(兼全)한 정승, 남구만]", 『경기일보』, 작성일: 2016년 12월 13일.
 
*이경식,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600&key=20150917.22018185720 남해 유배문학기행 <하> 남구만, 유자로 빚은 선비정신]", 『국제신문』, 작성일:2015년 09월 16일.
 
*이경식,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600&key=20150917.22018185720 남해 유배문학기행 <하> 남구만, 유자로 빚은 선비정신]", 『국제신문』, 작성일:2015년 09월 16일.
 
*우장문,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60822010006623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약천 남구만-원칙 어긋난 상관의 인사 철회시킨 소신파-]", 『경인일보』, 작성일:2016년 08월 23일.
 
*우장문,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60822010006623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 약천 남구만-원칙 어긋난 상관의 인사 철회시킨 소신파-]", 『경인일보』, 작성일:2016년 0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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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역사인물초상화]][[분류:역사인물]][[분류:인물]]
 
 
[[분류: 한글고문서]]
 
[[분류 : 인물]]
 

2017년 11월 26일 (일) 21:43 기준 최신판


남구만(南九萬)
역사인물초상화 초상 남구만 초상.jpg
대표명칭 남구만
한자표기 南九萬
생몰년 1629-1711
시호 문충(文忠)
약천(藥泉)
운로(雲路)
출생지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저서 약천집
대표직함 영의정
남일성(南一星)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
상훈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
유형 문신



정의

남구만(南九萬)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호는약천(藥泉),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내용

생애

  • 출생

남구만은 1629년(인조 7)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구만의 호는 약천(藥泉),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부친은 남일성(南一星), 모친은 강릉부사 권업(權曗)의 딸이다. 20세에 봉사(奉事) 정수의 딸과 혼인하였다. 1711년(숙종 37)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1]

  • 교유관계

남구만과 가장 교류가 많았던 유생으로는 서계 박세당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최석정(崔錫鼎), 최규서(崔奎瑞), 이사명(李師命), 최석항(崔錫恒), 정제두(鄭濟斗) 등 당대의 명사들이 그의 문인으로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소론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여 학계와 정치계에서 활약하였다.[2]

정치활동

서인의 논객으로 정계에 입문하다

28세(1656년)에 별시 문과 을과에 합격하여 이후 청요직(淸要職)으로 순조롭게 진출하였다. 30세에 윤선도(尹善道)의 국시소(國是疏)가 올라오자 정언으로서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탄핵에 앞장서 서인을 대표하는 논객의 역할을 하였다.[3]

대동법 헌의와 국방관의 정립

35세에 호남에 대한 대동법(大同法) 실시에 대해 헌의하였다. 43세부터 46세까지 4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 정책에 관여하였는데, 특히 이 시기는 남구만의 국방사상과 역사관이 정립되는 시기이며, 1698년(숙종 24)에 남구만이 신전자초방의 간행을 건의하는 계기가 되었다.[4]

정치적 격변기 남구만의 처세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로 소명을 받고 이어서 부제학, 공조 참의, 동지의금부사,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5월에는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어 보사 원종공신 (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다. 56세에 우의정, 57세에는 좌의정에 오른다.[5]

남구만은 임술옥사(壬戌獄事)의 고변자인 김환(金煥)의 처벌 건과 효종의 세실(世室), 태조(太祖)의 존호 추상 등 안건에서 박세채, 이상진(李尙眞)과 노선을 같이 하여 젊은 사류의 입장을 지지하였는데, 김환을 옹호하는 송시열 등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6]

1688년 장희빈(張禧嬪)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앞세운 남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된다. 이후 삼사(三司)의 구원으로 방환되었다가 다음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다시 추궁을 받아 강릉(江陵)에 중도부처되고 조카이자 문인(門人)인 박태보(朴泰輔)가 장사(杖死)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7]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서인이 다시 득세하자 남구만은 영의정으로 소명을 받는다.

  •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다

그러나 남인의 실각과 인현왕후 복위의 과정에서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이 자금을 써서 궁금(宮禁)과 결탁하여 공작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남구만은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이들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다시 노론과 대립하게 된다. 이에 사직과 대명(待命), 영의정 제수가 반복되다가, 결국 68세(1696)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는 재상을 맡지 않았다.[8]

지식 관계망

  • 남구만, 박세당, 박세체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남구만 박세당 A는 B와 교유하였다
남구만 최석정 A는 B의 스승이다
남구만 정제두 A는 B의 스승이다
남구만 이민서 A는 B와 교유하였다
이경여 이민서 A는 B의 어버이이다
남구만 송준길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윤선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대동법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김좌명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경신환국 A는 B와 관견이 있다
남구만 김환 A는 B와 관련이 있다
김환 경신환국 A는 B에 참여하였다
남구만 예송논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기사환국 송시열 A는 B와 관련이 있다
희빈 장씨 박세채 A는 B와 관련이 있다
갑술환국 인현황후 A는 B와 관련이 있다
갑술환국 남구만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정호 A는 B와 관련이 있다
남구만 신전자초방 편찬 A는 B를 주도하였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56년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청요직에 진출하였다
1657년 경연에서 송준길의 인정을 받아 서인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아졌다
1658년 효종이 인평대군의 상에 친림하는것을 간언하여 막았다
1658년 윤선도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1663년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 건의하였다
1664년 김좌명의 파직을 청하다 제직당했다
1675년 예송논쟁으로 남인이 득세하는 것을 경계하다 제직되었다
1698년 남구만신전자초방 편찬을 주도하였다
1679년 윤후허견 을 탄핵하다 거제로 유배당했다
1680년 경신환국의 결과로 보사 원등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687년 남구만이 영의정의 관직을 받았다
1688년 장희빈과 남인을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영의정이 되었다
1696년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2.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3.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4.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5.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6.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7.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8. 성백효, "약천집 해제", 『약천집』online,한국고전번역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황진, 「약천 남구만의 유배시 연구」, 『韓民族語文學』Vol.75, 한민족어문학회, 2017.
    • 최윤정, 「書簡을 통해 본 박세당과 남구만의 교유 양상」, 『한국고전연구』vol.24, 한국고전연구학회, 2011.
  • 단행본
    • 성당제, 『약천 남구만 문학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유용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