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괘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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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대표명칭 나주괘서사건
한자표기 羅州掛書事件
유형 사건
시대 조선
관련인물 이광사, 윤치
관련단체 소론, 노론


정의

나주괘서사건은 1755년 노론과 소론 사이에 발생한 역모사건이다.

내용

‘을해옥사’ 또는 ‘윤지(尹志)의 난’이라고도 한다.

사건의 경위

윤치(尹志)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1722년(경종 2) 임인무옥(壬寅誣獄)을 일으킨 김일경(金一鏡)의 옥사에 연좌되어 1724년 나주로 귀양갔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들 광철(光哲)과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들은 수차의 변란으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부류들과, 소론 중에서 벼슬을 지낸 집안들을 흡수하고, 우선 민심동요를 위하여 1755년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는데, 이것이 윤지의 소행임이 발각되어 거사(擧事)하기 전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1]

결과

이 때, 박찬신 조동정(趙東鼎)· 조동하(趙東夏)· 김윤(金潤) 등 많은 소론파 인물들이 함께 사형되었고, 이광사(李匡師)· 윤득구(尹得九) 등은 원찬(遠竄)되었다. 3월에는 조태구·김일경 등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였다. 이후 5월의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에서 답안지변서사건(答案紙變書事件)과 윤치 일파의 또 다른 역모사건이 발각되었고 이와 같은 일로 인해 남아 있는 소론파 인물들도 대부분 연루, 실세되어 재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소론의 역모 주동자를 모두 제거한 영조는 『천의소감 闡義昭鑑』이라는 책을 편찬하게 하여 이 사건들의 시말을 자세하게 밝히게 하였다.[2]

나주괘서사건과 탕평책

영조는 즉위 초부터 당쟁의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인좌의 난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계에서 차지하였다. 반면, 실세한 소론들은 거의 신원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원망이 누적되어 당화(黨禍)는 잠재된 채 윤지의 난으로 폭발되었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탕평책이 여의치 못했음을 반영한 사건이었다.[3]
  1. "나주괘서사건", 『두산백과』online.
  2. 반윤홍, "나주괘서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반윤홍, "나주괘서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