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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백제 무왕|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 법왕|법왕]]이 그의 즉위년(599년)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금산사(金山寺)]]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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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백제 무왕|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 법왕|법왕]]이 그의 즉위년(599년)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金山寺)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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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신라 경덕왕|경덕왕]] 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순제(順濟)]]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順濟)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계율을 엄수하는 수행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守文)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守文)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2017년 8월 21일 (월) 02:15 판

김제 금산사
(金堤 金山寺)
대표명칭 김제 금산사
영문명칭 Geumsansa Temple, Gimje
한자 金堤 金山寺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경내문화재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김제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김제 금산사 석련대, 김제 금산사 석등, 김제 금산사 석고미륵여래입상, 김제 금산사 미륵전, 김제 금산사 대장전,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김제 금산사 노주,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본사이다.[1]

내용

『금산사사적(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년)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金山寺)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 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順濟)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守文)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그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던 승려는 지훈(智訓)·덕행(德行)·석준(釋俊)·천정(天淨)·응원(應元)·학련(學蓮)·태전(太顚)·운근(雲根) 등이었다.

1725년(영조 1) 금산사에서 남악(南岳)이 화엄대법회를 열었다. 고종 때에는 총섭(摠攝:주지)으로 취임한 용명(龍溟)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였고, 1934년 성렬(成烈)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 방등계단 앞에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민백]

모악산 도립공원 입구에 우뚝 서 있는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고, 776년에 진표율사가 고쳐 지어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을 비롯하여 지정문화재 10여점이 있으며, 그외에도 부속건물이 많아 호남제일의 고찰로 손꼽힌다. 목조로 된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삼층법당으로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있다. [구석구석]

금산사는 후백제의 견훤이 유폐되었던 절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는 백제시대에 지어지고 신라의 통일 이후 혜공왕 때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절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 불교의 주류였던 교종 계통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역할을 했는데, 법상종이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종파라 이곳 절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없는 대신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절의 중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산사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眞表)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대공전(大恭殿)·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재건하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미륵전·대장전·대적광전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금강문·미륵전 등을 중수하였다.

금산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高僧)은 혜덕왕사(慧德王師) 이외에도 도생승통(道生僧統)·원명(圓明)·진묵(震默)·소요(逍遙)·남악(南嶽) 등이 있다.

주요 건물로는 미륵전(국보 62)·대장전(보물 827)·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一柱門)·금강문(金剛門)·보제루(普濟樓) 등이 있고, 석련대(石蓮臺:보물 23)·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보물 24)·5층석탑(보물 25)·방등계단(方等戒壇. 보물 26)·6각다층석탑(보물 27)·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8)·석등(보물 828)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금산사는 일대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산백과]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제 금산사 - A는 B가 창건하였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소현 A는 B를 위한 비이다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석련대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석등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석고미륵여래입상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대장전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노주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김제 금산사 A는 B에 있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금산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