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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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7일 (월) 13:50 판

김원(金薳)
대표명칭 김원
한자표기 金薳
영문명칭 Kim Won
생몰년 ?-?
시대 신라
대표저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성격 서예가



정의

신라시대의 서예가.

내용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1] 문장과 글씨에 능통하여[2]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보물 제158호)의 글씨를 쓰고,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襄陽 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보물 제446호의 비문을 지었다.

신라시대의 승려 체징(體澄, 804-880)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의 비문은 김영(金穎)이 짓고 김원(金薳)과 김언경(金彦卿)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쓴 특이한 예이다. 비문의 첫머리 부분부터 7행의 '선(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체(楷書體)로 썼고, 그 이하는 김언경행서체(行書體)로 썼다.[3]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생각된다.[4]

보조선사탑비의 탁본은 중국 청나라에도 소개되었으며,[5] 청(淸) 말기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 "하나의 비에 두 사람의 글씨가 하나의 법칙을 이루었다"라는 뜻.[6])이라고 평한 바 있다.[7] 또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는 우리나라 서예사상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최고(最古)의 예로서 의의가 크다.[8]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체징 A는 B를 위한 비이다 884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김원 A는 B가 비문을 썼다 883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김언경 A는 B가 비문을 썼다 883년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홍각선사 A는 B를 위한 비이다 886년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김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왕희지체 A는 B로 쓰여졌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김원 A는 B와 관련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7 - 唐 유학생 출신이 빛낸 신라 塔碑미술", 『신동아』 2001년 9월호.
  2. "선림원지홍각선사비(禪林院址弘覺禪師碑)",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3. 박은순, "김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응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박은순, "김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보물 제158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문화재 기본 정보,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online, 문화재청.
  7. 김응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박은순, "김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
  10. "보림사 보조선사 탑비 탑본",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