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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본관은 의성, 안동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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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내용'''==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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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며 본관은 의성으로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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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배경===
 
===학문적 배경===
1556년 동생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찾아가 『[[서경]]』, 『[[역학계몽|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 『[[대학의의|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다.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였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하였고, 1590년 [[정여립|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ref>이완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485 김성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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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년 동생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찾아가 『[[서경]]』, 『[[역학계몽|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 『[[대학의의|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였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하였고, 1590년 [[정여립|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에 속하였다.<ref>이완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485 김성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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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 생활===
 
===관직 생활===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72년 봉교(奉敎)가 되어 [[노산묘|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채용할 것을 진언했으며, 임금의 덕과 당시의 잘못된 폐단에 대하여 논했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정현룡(鄭見龍)]], [[김광옥|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임씨(林氏)·나씨(羅氏) 사이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김굉필(金宏弼)]]·[[정여창|정여창(鄭汝昌)]]·[[조광조|조광조(趙光祖)]]·[[이언적|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사직단|나주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자성록|자성록(自省錄)]]』, 『[[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ref>이완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485 김성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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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72년 봉교(奉敎)가 되어 [[노산묘|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단종]]의 능)으로 봉축하고,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채용할 것을 진언했으며, 임금의 덕과 당시의 잘못된 폐단에 대하여 논했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했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의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정현룡(鄭見龍)]], [[김광옥|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임씨(林氏)·나씨(羅氏) 사이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워 [[김굉필|김굉필(金宏弼)]]·[[정여창|정여창(鄭汝昌)]]·[[조광조|조광조(趙光祖)]]·[[이언적|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고,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사직단|나주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자성록|자성록(自省錄)]]』, 『[[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에 이어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ref>이완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485 김성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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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활동===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 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류성룡|류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 전투|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 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ref>이완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485 김성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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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 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류성룡|류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 전투|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경상우도 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ref>이완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9485 김성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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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A141/A141.htm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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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h.aks.ac.kr/Encyves/Graph/A142/A142.htm 김주국의 편지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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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김학수, 「김성일(金誠一)의 임란 중 활동과 인적 네트워크」, 『南冥學硏究』41,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4, 6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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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김성일(金誠一)의 임란 중 활동과 인적 네트워크」, 『南冥學硏究』, Vol.41, No.-,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4, 61-98쪽.
**허태구, 「김성일(金誠一) 초유(招諭) 활동의 배경과 경상우도 의병(義兵) 봉기의 함의」, 『南冥學硏究』41,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4, 27-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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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구, 「김성일(金誠一) 초유(招諭) 활동의 배경과 경상우도 의병(義兵) 봉기의 함의」, 『南冥學硏究』, Vol.41, No.-,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4, 27-60쪽.
**하우봉, 「김성일의 일본인식과 귀국보고」, 『한일관계사연구』43, 한일관계사학회, 2012, 127-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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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봉, 「김성일의 일본인식과 귀국보고」, 『한일관계사연구』, Vol.43, No.-, 한일관계사학회, 2012, 127-174쪽.
  
 
*웹자원
 
*웹자원

2017년 11월 25일 (토) 00:41 기준 최신판

김성일(金誠一)
이완재, "김성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김성일
한자표기 金誠一
생몰년 1538-1593
본관 의성(義城)
시호 문충공(文忠公)
학봉(鶴峰)
사순(士純)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
사망지 경상남도 진주시(진주성)
시대 조선
대표저서 상례고증(喪禮考證)
대표직함 경상우도관찰사, 통신부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순찰사
성격 문신
유형 학자


정의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내용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며 본관은 의성으로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다.

학문적 배경

1556년 동생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으로 이황을 찾아가 『서경』, 『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 『대학의의(大學疑義)』 등을 익혔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그 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였다. 정치적으로 김성일은 동인(東人)에 가담하였고,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 후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金宇顒)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에 속하였다.[1]

임진왜란 당시의 활동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 되었다.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보고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해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 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했고,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의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서울로 소환되던 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류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고,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경상우도 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죽었다.[2]


연계 자원 보러 가기
학봉 김성일 종가 고문헌을 통해 살펴보는 조선 사대부의 삶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학봉 행장 언해


지식 관계망

  • 학봉 김성일가의 한글 고문서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성일 진주성 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황 김성일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김성일 성균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성일 도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자성록 김성일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퇴계집 김성일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주자서절요 김성일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김시민 진주성 전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류성룡 김성일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성일 곽재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성일 정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538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568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했다
1592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하다 사망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5.189787 128.077976 김성일은 경상남도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안동MBC뉴스] [R]'학봉' 초상화.. '400년 한지'에 부활(게시일: 2017. 2. 16.)

주석

  1. 이완재, "김성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완재, "김성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학수, 「김성일(金誠一)의 임란 중 활동과 인적 네트워크」, 『南冥學硏究』, Vol.41, No.-,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4, 61-98쪽.
    • 허태구, 「김성일(金誠一) 초유(招諭) 활동의 배경과 경상우도 의병(義兵) 봉기의 함의」, 『南冥學硏究』, Vol.41, No.-,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4, 27-60쪽.
    • 하우봉, 「김성일의 일본인식과 귀국보고」, 『한일관계사연구』, Vol.43, No.-, 한일관계사학회, 2012, 127-174쪽.
  • 웹자원
    • 이완재, "김성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