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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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근거는 두 번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 편지는 김주국이 김광찬이 죽던 날인 3월 6일에 아들에게 남긴 글이다. '네 병이 윤이월 스무사나흘 즈음에 더 심해지니 나에게 이르되 문자(文字:한문으로 써 놓은 글)가 있으니 후에 보실까 하고 인하여 후사를 부탁하는 말로 나에게 이르니, 이것이 스무사흗날 쓴 것이로다.'라는 부분을 보면 김광찬이 아내 진성이씨에게 편지를 쓴 이튿날인 윤 2월 24일에, 부친 김주국(金柱國)에게는 자기가 써 놓은 글(文字)이 있음을 알리고 당부하는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편지에는 이와 같은 사정을 쓰고 이어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픈 심정을 기술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는 두 번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 편지는 김주국이 김광찬이 죽던 날인 3월 6일에 아들에게 남긴 글이다. '네 병이 윤이월 스무사나흘 즈음에 더 심해지니 나에게 이르되 문자(文字:한문으로 써 놓은 글)가 있으니 후에 보실까 하고 인하여 후사를 부탁하는 말로 나에게 이르니, 이것이 스무사흗날 쓴 것이로다.'라는 부분을 보면 김광찬이 아내 진성이씨에게 편지를 쓴 이튿날인 윤 2월 24일에, 부친 김주국(金柱國)에게는 자기가 써 놓은 글(文字)이 있음을 알리고 당부하는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편지에는 이와 같은 사정을 쓰고 이어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픈 심정을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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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편지는 2년이 지난 1767년 김주국이 위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며느리 진성 이씨에게 남긴 편지로서, 전답에 대한 권리에 대해 자세히 정리하였다. 편지의 말미에 '내가 하루아침에 죽을지도 모르므로, 다시 찾아서 보고 설움을 참고 번역하여 며느리가 보도록 한다.'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는 모두 한문으로 써 보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f>'[http://archive.kostma.net/Inspection/insDirView.aspx?dataUCI=G002+LET+KSM-XF.1765.0000-20140430.B0018_001-1 1765년 김광찬이 진성이씨에게 쓴 탁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문서자료관<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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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편지는 아들의 대상(大祥:죽은 뒤에 두 해만에 지내는 제사)이 끝날 무렵인 1767년 3월, 김주국이 위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며느리 진성 이씨에게 남긴 편지로서, 전답에 대한 권리에 대해 자세히 정리하였다. 편지의 말미에 '내가 하루아침에 죽을지도 모르므로, 다시 찾아서 보고 설움을 참고 번역하여 며느리가 보도록 한다.'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는 모두 한문으로 써 보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f>'[http://archive.kostma.net/Inspection/insDirView.aspx?dataUCI=G002+LET+KSM-XF.1765.0000-20140430.B0018_001-1 1765년 김광찬이 진성이씨에게 쓴 탁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문서자료관<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ref>
  
 
==관련 항목==
 
==관련 항목==

2017년 4월 23일 (일) 04:07 판

김광찬·김주국의 편지
한글팀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01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메인.png
영문명칭 A letter of Kim Juguk to his daughter-in-law, Yi of Jinseong
작자 김광찬, 김주국
작성시기 1765년-1767년
소장처 의성김씨 학봉종택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25.0×74.0㎝
판본 필사
수량 1장
표기문자 한글



정의

1765년에 남편 김광찬(金光燦)과 시아버지 김주국(金柱國)이 진성이씨(眞城李氏)에게 보낸 간찰이다.

내용

김주국의 아들 김광찬진성이씨와 혼인했지만,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광찬은 죽기 직전인 1765년에 아내 진성이씨에게 자신이 병으로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지 말고 자신의 뜻을 이어 집안을 보전하라는 당부와 자신이 생전에 구입한 전답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간찰로 남겼다. 김주국은 아들이 남긴 간찰을 보고 자신의 슬픈 감정을 그 편지에 덧붙여 기록하였다. 이어 김주국은 1767년 아들의 대상(大祥)이 지난 뒤 다시 간찰을 보고 느낀 감회와 아들이 남긴 전답에 대한 당부를 다시 한 번 덧붙여 며느리 진성이씨에게 전하였다. [1]

부연설명

이 자료는 총 세 가지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김광찬이 사망한 해인 1765년에 쓰여진 첫 번째와 두 번째 편지, 그리고 1767년에 쓰여진 세 번째 편지이다. 김주국이 1, 2번째 편지를 1767년에 한글로 필사한 후 말미에 자신의 의견을 드러낸 세 번째 편지를 써 며느리인 진성 이씨에게 전해주었다.
첫 번째는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8대손인 김광찬(金光燦)이 세상을 떠나기 전인 윤 2월 23일, 아내인 진성이씨에게 남긴 편지이다. 이 편지는 자신이 죽은 후 상심으로 인해 몸을 상하게 하여 가정을 소흘히 하지 말고 남은 가족을 건사해줄 것을 부탁하는 글이다. 김광찬이 소유한 전답의 소출에 대한 자세한 내역이 실려 있으며 글에 적힌 전답은 모두 종물(宗物:종가의 소유물)이니 생전에 사사로이 팔지 못하도록 명시하였다. 이 편지는 한문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두 번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 편지는 김주국이 김광찬이 죽던 날인 3월 6일에 아들에게 남긴 글이다. '네 병이 윤이월 스무사나흘 즈음에 더 심해지니 나에게 이르되 문자(文字:한문으로 써 놓은 글)가 있으니 후에 보실까 하고 인하여 후사를 부탁하는 말로 나에게 이르니, 이것이 스무사흗날 쓴 것이로다.'라는 부분을 보면 김광찬이 아내 진성이씨에게 편지를 쓴 이튿날인 윤 2월 24일에, 부친 김주국(金柱國)에게는 자기가 써 놓은 글(文字)이 있음을 알리고 당부하는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편지에는 이와 같은 사정을 쓰고 이어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픈 심정을 기술하였다.
세 번째 편지는 아들의 대상(大祥:죽은 뒤에 두 해만에 지내는 제사)이 끝날 무렵인 1767년 3월, 김주국이 위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며느리 진성 이씨에게 남긴 편지로서, 전답에 대한 권리에 대해 자세히 정리하였다. 편지의 말미에 '내가 하루아침에 죽을지도 모르므로, 다시 찾아서 보고 설움을 참고 번역하여 며느리가 보도록 한다.'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는 모두 한문으로 써 보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

관련 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주국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A는 B를 저술했다 1765년
김광찬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A는 B를 저술했다 1767년
김광찬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 A는 B에 언급된다
김광찬 진성이씨 A는 B의 남편이다
김주국 김광찬 A는 B의 어버이이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65년 김주국이 며느리에게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편지를 부쳤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609771 128.669643 의성김씨 학봉종택에 김광찬과 김주국의 편지가 소장되어 있다.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73쪽.
  2. '1765년 김광찬이 진성이씨에게 쓴 탁서', 한국고문서자료관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