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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이이(李珥)]]를 추종하는 학문상의 유파이다. <ref> 이운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489  기호학파(畿湖學派)]",<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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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황(李滉)]]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지방의 성리학자들을 지칭하는 [[영남학파]]와 구별하여 일컫는 말이다. 기호지방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충청도 일원으로서, 동쪽은 관동지방, 남쪽은 호남지방, 북쪽은 관서지방과 접경을 이룬다. 이곳에서 이이의 성리설을 추종하는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후기에 이르면서 그 학통을 전수하여 하나의 학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ref> 이운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489  기호학파(畿湖學派)]",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황|이황(李滉)]]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지방의 성리학자들을 지칭하는 [[영남학파]]와 구별하여 일컫는 말이다. 기호지방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충청도 일원으로서, 동쪽은 관동지방, 남쪽은 호남지방, 북쪽은 관서지방과 접경을 이룬다. 이곳에서 이이의 성리설을 추종하는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후기에 이르면서 그 학통을 전수하여 하나의 학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ref> 이운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489  기호학파(畿湖學派)]",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조선시대 유학의 변화와 주요 인물===
 
===조선시대 유학의 변화와 주요 인물===
고려 말에 정주학이 전래되고, 조선조 건국과 더불어 유교적 학풍이 적극 장려되면서 유교의 학술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기묘사화]]를 전후하여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의 현실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지조를 돈독히 함과 동시에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도 큰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김안국|김안국(金安國)]]·[[김정국|김정국(金正國)]]·[[서경덕|서경덕(徐敬德)]] 등을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좀 더 성숙된 성리학자로서 영남에는 [[이황]]·[[조식|조식(曺植)]], 호남에는 [[이항|이항(李恒)]]·[[김인후|김인후(金麟厚)]]·[[기대승|기대승(奇大升)]], 기호에는 [[이이]]와 [[성혼|성혼(成渾)]]·[[송익필|송익필(宋翼弼)]]이 있었다.<ref> 이운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489  기호학파(畿湖學派)]",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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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정주학(程朱學)이 전래되고, 조선조 건국과 더불어 유교적 학풍이 적극 장려되면서 유교의 학술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기묘사화]]를 전후하여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의 현실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지조를 돈독히 함과 동시에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도 큰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김안국|김안국(金安國)]]·[[김정국|김정국(金正國)]]·[[서경덕|서경덕(徐敬德)]] 등을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좀 더 성숙된 성리학자로서 영남에는 [[이황]]·[[조식|조식(曺植)]], 호남에는 [[이항|이항(李恒)]]·[[김인후|김인후(金麟厚)]]·[[기대승|기대승(奇大升)]], 기호에는 [[이이]]와 [[성혼|성혼(成渾)]]·[[송익필|송익필(宋翼弼)]]이 있었다.<ref> 이운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489  기호학파(畿湖學派)]",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기호학파의 특성===
 
===기호학파의 특성===
기호지방의 중심인물은 이이·성혼·송익필의 세 사람이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은 비록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지만, 그와 논변을 벌인 성혼이나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성혼이 이이와 논변을 벌였다 해도 대립적 입장만은 아니었고, 또 송익필의 사단칠정 이기설이 이이의 견해와 같았던 점으로 보아, 서로 학문적 갈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후학들이 세 학자에게서 두루 배워 기호의 학문을 형성하였으니, 이를 율곡학파라 하지 않고 기호학파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ref> 이운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489  기호학파(畿湖學派)]",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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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지방의 중심인물은 이이·성혼·송익필 등 세 사람이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은 비록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지만, 그와 논쟁을 벌인 성혼이나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성혼이 이이와 논변을 벌였다 해도 대립적 입장만은 아니었고, 또 송익필의 사단칠정 이기설이 이이의 견해와 같았던 점으로 보아, 서로 학문적 갈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후학들이 세 학자에게서 두루 배워 기호의 학문을 형성하였으니, 이를 율곡학파라 하지 않고 기호학파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ref> 이운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489  기호학파(畿湖學派)]",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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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3일 (목) 17:22 기준 최신판

기호학파
(畿湖學派)
Official group.png
대표명칭 기호학파
한자표기 畿湖學派
유형 단체


정의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李珥)를 추종하는 학문상의 유파이다. [1]

내용

기호학파의 형성

이황(李滉)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지방의 성리학자들을 지칭하는 영남학파와 구별하여 일컫는 말이다. 기호지방은 경기도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충청도 일원으로서, 동쪽은 관동지방, 남쪽은 호남지방, 북쪽은 관서지방과 접경을 이룬다. 이곳에서 이이의 성리설을 추종하는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후기에 이르면서 그 학통을 전수하여 하나의 학파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2]

조선시대 유학의 변화와 주요 인물

고려 말에 정주학(程朱學)이 전래되고, 조선조 건국과 더불어 유교적 학풍이 적극 장려되면서 유교의 학술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은 기묘사화를 전후하여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의 현실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지조를 돈독히 함과 동시에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도 큰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서경덕(徐敬德) 등을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좀 더 성숙된 성리학자로서 영남에는 이황·조식(曺植), 호남에는 이항(李恒)·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 기호에는 이이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이 있었다.[3]

기호학파의 특성

기호지방의 중심인물은 이이·성혼·송익필 등 세 사람이다. 그런데 기호학파의 성리학자들은 비록 이이의 학설을 추종했지만, 그와 논쟁을 벌인 성혼이나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성혼이 이이와 논변을 벌였다 해도 대립적 입장만은 아니었고, 또 송익필의 사단칠정 이기설이 이이의 견해와 같았던 점으로 보아, 서로 학문적 갈등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후학들이 세 학자에게서 두루 배워 기호의 학문을 형성하였으니, 이를 율곡학파라 하지 않고 기호학파라 함은 당연하다 하겠다.[4]

지식 관계망

  • 고산구곡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기호학파 이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기호학파 성혼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기호학파 송익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기호학파 기묘사화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기호학파 고산구곡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기호학파 권상하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주석

  1. 이운구, "기호학파(畿湖學派)",『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운구, "기호학파(畿湖學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운구, "기호학파(畿湖學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운구, "기호학파(畿湖學派)",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형성, 「이이(李珥)의 리통기국론(理通氣局論)에 대한 후학의 학문적계승과 변화 양상 탐구』의 예학사(禮學史)的 위상(位相)」, 『儒學硏究』36,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6, 207-235쪽.
    • 이종호, 「영남선비들의 구곡경영과 최남복의 백련서사」, 『嶺南學』18,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99-158쪽.
    • 이영자, 「율곡 직계 성리학의 전개와 특성」, 『인문학연구』36,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9, 267-286쪽.
    • 이상원,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의 구성상 특징과 소재(所載) 시문(詩文)에 대한 검토」, 『국제어문』31, 국제어문학회,87-114쪽.
    • 장정수, 「〈黃江九曲歌〉의 창작 배경 및 구성 방식」, 『時調學論叢』21, 한국시조학회, 2004, 241-2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