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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으로 결혼정책을 추진했다. 전국 여러 지역의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그들을 회유하고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따라 고려 태조는 무려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이러한 결혼정책은 태조 사후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ref>김한종 외, 『한국사 사전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책과함께어린이. 온라인 참조:"[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0686&cid=47306&categoryId=47306 왕건(태조)]", 어린이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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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된 국가의 국론 단결을 위해 고구려 계승론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우고 북진정책을 실시했다. 먼저 폐허가 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에 왕식렴을 보내어 이름을 서경(西京)이라 고치고 북진의 기지로 삼았다.<ref>삥꼴라, "[http://blog.naver.com/hh2hh2s1/100050926984 고려(태조의 북진정책과 광종의 정책)]", 한국게시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블로그 - 삥꼴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후 서북면을 개척하여 발해(渤海)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를 공략하는 등의 정책을 실시한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고구려 영토의 일부분을 수복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_%ED%83%9C%EC%A1%B0 고려 태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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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했다. 신라 출신 승려 [[충담|충담(忠談)]]을 [[왕사|왕사(王師)]]로 세우고 940년 그가 죽자 [[원주 흥법사|원주 흥법사(原州 興法寺)]]에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탑비]]를 세워 친히 비문을 지어주기도 했다. 또한 해마다 무차대회를 개최하여 신분, 귀천, 지역에 상관없이 불법을 듣게 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_%ED%83%9C%EC%A1%B0 고려 태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
  
  
태조는 통일 직후 빈민구제기구인 흑창(黑倉)을 설치하고 세금을 낮추어 민심을 안정시키는 한편, 정략 결혼을 통해 호족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또 통일된 국가의 국론 단결을 위해 고구려 계승론을 내세웠고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신라 출신 승려 [[충담|충담(忠談)]]을 왕사로 세웠다.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7월 26일 (수) 14:08 판

고려 태조(高麗 太祖)
대표명칭 고려 태조
한자표기 高麗 太祖
생몰년 877년 1월 31일-943년 7월 4일
본관 개성
이칭 왕건
시호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
출생지 송악
사망지 개경
시대 후삼국시대~고려시대
왕륭
위숙왕후
후임자 고려 혜종



정의

고려의 초대국왕.

내용

생애

고려 태조(高麗 太祖)는 877년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륭(王隆)과 그의 부인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869년에는 궁예(弓裔)의 휘하로 들어가 장수가 되었다. 900년에는 궁예의 명으로 한강 하류와 남한강 유역을 장악하여 아찬(阿粲)벼슬을 받았고 903년에는 후백제의 금성군을 함락시키는 등 뛰어난 전공을 올려 913년에는 시중(侍中)이 되었다.[1]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새 왕조를 세우고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2]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항복을 받아내 신라를 합병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했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고 중외에 반포하였다. 말년에는 후계자들을 훈계하기 위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3]

주요정책

고려 태조 왕건은 안정화를 위한 호족세력 통합정책,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려는 북진정책, 불교와 재래의 관습을 중시 여겨 민심을 수습하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는 숭불정책을 국가정책의 기본 3대 정책으로 삼았다.[4]

통합정책

호족세력을 통합하는 방법으로 결혼정책을 추진했다. 전국 여러 지역의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그들을 회유하고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따라 고려 태조는 무려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이러한 결혼정책은 태조 사후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5]

북진정책

통일된 국가의 국론 단결을 위해 고구려 계승론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우고 북진정책을 실시했다. 먼저 폐허가 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에 왕식렴을 보내어 이름을 서경(西京)이라 고치고 북진의 기지로 삼았다.[6] 이후 서북면을 개척하여 발해(渤海)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여진족(女眞族)의 거주지를 공략하는 등의 정책을 실시한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고구려 영토의 일부분을 수복하였다.[7]

숭불정책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했다. 신라 출신 승려 충담(忠談)왕사(王師)로 세우고 940년 그가 죽자 원주 흥법사(原州 興法寺)탑비를 세워 친히 비문을 지어주기도 했다. 또한 해마다 무차대회를 개최하여 신분, 귀천, 지역에 상관없이 불법을 듣게 했다.<ref>"고려 태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online</online>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려 태조 왕륭 A는 B의 아들이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77년 고려 태조가 출생하였다.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고려 태조", 『두산백과』online.
  2. 하현강, "태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고려 태조", 『위키백과』online.
  4. 박문각 시사상식편집부,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온라인 참조: "고려 태조의 3대 국가정책", 시사상식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김한종 외, 『한국사 사전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책과함께어린이. 온라인 참조:"왕건(태조)", 어린이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삥꼴라, "고려(태조의 북진정책과 광종의 정책)", 한국게시판, 『네이버 블로그 - 삥꼴라』online.
  7. "고려 태조", 『위키백과』online.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