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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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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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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신돈이 실각하자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시비의 소생인 그가 아들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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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해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그 뒤 그는 신돈이 주살되자 궁중에 들어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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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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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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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 복잡한 외교 문제가 계속 발생하였다.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해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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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위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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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러자 크게 분개한 우왕은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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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성계에 의해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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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이치(移置)되었다. 다시 1389년 11월김저(金佇)와 모의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다.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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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무덤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ref>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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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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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은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죽임을 당했을 뿐 아니라 신돈(辛旽)의 아들로까지 몰렸으므로 죽은 뒤에도 시호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우왕’이라고 부르며, 《고려사(高麗史)》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서는 아예 성도 신(辛)으로 바꿔 신우(辛禑)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서자로서 왕위를 도둑질했다고 하여 반역(叛逆) 열전(列傳)으로 분류해 놓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서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이 비첩(婢妾)인 반야(般若)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고려사》와 《동국통감》에는 반야가 낳았던 아들이 죽은 뒤 다른 아이를 데려다 기른 것이라고까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건국 세력들이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세운다)’이나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이나 창왕은 왕씨가 아니다)’에 근거해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고 내세운 주장으로 해석된다.<ref>두산백과</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9월 17일 (일) 00:17 판

고려 우왕(高麗 禑王)
대표명칭 고려 우왕
한자표기 高麗 禑王
생몰년 1365년(공민왕 14)-1389년(공양왕 1)
이칭 모니노(牟尼奴),
사망지 개경
시대 고려시대
배우자 근비 이씨
고려 공민왕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
자녀 고려 창왕
전임자 고려 공민왕
후임자 고려 창왕



정의

고려의 제 32대 국왕.

내용

성장 배경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1371년(공민왕 20)신돈이 실각하자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시비의 소생인 그가 아들임을 밝혔다. 공민왕은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해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그 뒤 그는 신돈이 주살되자 궁중에 들어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1]

즉위

우는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 복잡한 외교 문제가 계속 발생하였다.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해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폐위와 죽음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그러자 크게 분개한 우왕은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이성계에 의해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 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이치(移置)되었다. 다시 1389년 11월김저(金佇)와 모의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옮겨졌다.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2] 우왕의 장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무덤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3]

논란

우왕은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죽임을 당했을 뿐 아니라 신돈(辛旽)의 아들로까지 몰렸으므로 죽은 뒤에도 시호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우왕’이라고 부르며, 《고려사(高麗史)》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서는 아예 성도 신(辛)으로 바꿔 신우(辛禑)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서자로서 왕위를 도둑질했다고 하여 반역(叛逆) 열전(列傳)으로 분류해 놓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서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이 비첩(婢妾)인 반야(般若)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고려사》와 《동국통감》에는 반야가 낳았던 아들이 죽은 뒤 다른 아이를 데려다 기른 것이라고까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건국 세력들이 ‘폐가입진론(廢假立眞論,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세운다)’이나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 우왕이나 창왕은 왕씨가 아니다)’에 근거해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과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려고 내세운 주장으로 해석된다.[4]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려 우왕 고려 공민왕 A는 B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신돈 A는 B와 관련이 있다
백문보 고려 우왕 A는 B의 스승이다
전녹생 고려 우왕 A는 B의 스승이다
정추 고려 우왕 A는 B의 스승이다
고려 우왕 이인임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려 우왕 왕안덕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려 우왕 위화도회군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려 우왕 조선 태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려 우왕 최영 A는 B와 관련이 있다
고려 우왕 김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363년 고려 우왕이 출생하였다.
1374년 고려 우왕이 즉위하였다.
1388년 고려 우왕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1389년 고려 우왕이 서거하였다.

주석

  1. 민백
  2. 민백
  3. 두산백과
  4. 두산백과

참고문헌

  • 민현구, "우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