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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의 형성===
 
===강화학파의 형성===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정제두 |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와 [[이광려]] 등을 주축으로 한 단체?학통?이 이르는 말이다.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정제두 |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와 [[이광려]] 등을 주축으로 한 단체?학통?이 이르는 말이다.  
[[정제두]]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면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이 확립된 이후 그 아들인 [[정후일 | 정후일(政厚一)]]과 그의 문인인 [[이광명 | 이광명(李匡鳴)]], [[이광려 | 이광려(李匡呂)]]등에게 전승되었다. 이후 이 학문은 가학(家學)으로 전승된다. 이와 같이 정제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통을 '하곡학', '강화학', '강화양명학', '강화하곡학', 등으로 부르고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를 강화학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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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면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이 확립된 이후 그 아들인 [[정후일 | 정후일(政厚一)]]과 그의 문인인 [[이광명 | 이광명(李匡鳴)]], [[이광려 | 이광려(李匡呂)]]등에게 전승되었다. 이후 이 학문은 가학(家學)으로 전승되었는데, 이와 같이 정제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통을 '하곡학', '강화학', '강화양명학', '강화하곡학', 등으로 부르고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를 강화학파라고 하였다.<ref>천병돈, 「강화학파의 형성과 사상적 계보」 Vol.7, 『인천학연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7, 3쪽.</ref>
  
 
===학문적 특징===
 
===학문적 특징===
강화학하의 학문적 특징은 실심(實心), 실리(實理), 실사(實事), 실행(實行) , 실효(實效)라는 기념을 내포하는 실학이며 한국적 양명학으로서 실심실학(實心實學)이라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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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의 내용으로 보면, 그들은 정제두 이래로 양명학을 수용하고 도교와 불교까지 섭렵하고자 했고, 이학(理學:유학)보다는 한학(漢學)을 연구하고 동시에 국학(國學)을 일으켰다.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소화했으며, 훈민정음연구·국어학·국사학·서법(書法)·문자학·문헌학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을 남겼다.<ref>심경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537 강화학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기존 학문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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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의 학자들====
이들은 당시 선비들의 학풍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유학자들은 사장학에 빠져서 근본적인 바음은 버리고 문장의 기교와 같은 말엽적인 것에 전념하며, 참마음을덮어버리고 거짓을 꾸미며 공리를 추구하는 사욕을 인의의명분으로 포장하여 꾸미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인간의 내면적 가치보다 부귀공명과 같은 외적 가치를 추구하며, 도덕규범이나 의리를 객관적 사물에서 구하고자 하여 그 결과 외적 가치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이 일어나고 도독규범과 의리 등에 대한 견해차로 분열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자의 말에서 '옛날 학자들은 자기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고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 제시한 것처럼 학문의 목적과 가치를 자아완성에 두고 내면의 수양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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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에 [[이광사 | 이광사(李匡師)]], 국사학에 [[이금익 | 이긍익(李肯翊)]]과 [[황현 | 황현(黃玹)]], 한학(漢學)에 [[신작 | 신작(申綽)]], 훈민정음연구에 [[유희 | 유희(柳喜)]], 문자학에 [[남정화 |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 | 남극관(南克寬)]] 등 오늘날 국학 분야에서 거론되는 선구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학맥에 속한다. 홍양호(洪良浩)나 이종휘(李種徽)같은 학자들도 이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ref>심경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1537 강화학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현실 정치에 대ㅏㄴ 강화학파 학자들의 인식
 
그러므로 헛된 명분과 명성이나 명예를 좋아하여 수많은 인재를 죽이고 끊임없는 소모적 논쟁으로 국력을 쇠약하게 하며, 나라를 파당으로 분열시킨 원인인 붕당에 대한 비판은 강화학파 학자들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다.
 
<!--결론 참고해서 나머지 부분 작성하기-->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10월 31일 (화) 02:14 판

강화학파(江華學派)
대표명칭 강화학파
한자표기 江華學派
창립자 정제두
창립시대 조선


정의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이광려 등을 주축으로 한 단체?학통?이 이르는 말이다.

내용

강화학파의 형성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이광려 등을 주축으로 한 단체?학통?이 이르는 말이다. 정제두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면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이 확립된 이후 그 아들인 정후일(政厚一)과 그의 문인인 이광명(李匡鳴), 이광려(李匡呂)등에게 전승되었다. 이후 이 학문은 가학(家學)으로 전승되었는데, 이와 같이 정제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통을 '하곡학', '강화학', '강화양명학', '강화하곡학', 등으로 부르고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를 강화학파라고 하였다.[1]

학문적 특징

학술의 내용으로 보면, 그들은 정제두 이래로 양명학을 수용하고 도교와 불교까지 섭렵하고자 했고, 이학(理學:유학)보다는 한학(漢學)을 연구하고 동시에 국학(國學)을 일으켰다.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소화했으며, 훈민정음연구·국어학·국사학·서법(書法)·문자학·문헌학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을 남겼다.[2]

강화학파의 학자들

서법에 이광사(李匡師), 국사학에 이긍익(李肯翊) 황현(黃玹), 한학(漢學)에 신작(申綽), 훈민정음연구에 유희(柳喜), 문자학에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南克寬) 등 오늘날 국학 분야에서 거론되는 선구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학맥에 속한다. 홍양호(洪良浩)나 이종휘(李種徽)같은 학자들도 이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화학파 정제두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정제두 이광사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강화학파 유희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언문지 유희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1. 천병돈, 「강화학파의 형성과 사상적 계보」 Vol.7, 『인천학연구』,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2007, 3쪽.
  2. 심경호, "강화학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심경호, "강화학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