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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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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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터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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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 2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3,106㎡이고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9267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강진 월남사|월남사(月南寺)]]의 창건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려승 진각초창 유이규보비(高麗 僧眞覺初創 有李奎報碑)’라 하여 [[순천 송광사|송광사(松廣寺)]] 제2세인 [[혜심|진각국사(眞覺國師)]]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강진 월남사|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시대 [[임진왜란|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소실되고 그 뒤 복원불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17세기 중반 이미 폐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ref>이영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958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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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월남사|월남사(月南寺)]]의 창건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려승 진각초창 유이규보비(高麗 僧眞覺初創 有李奎報碑)’라 하여 [[순천 송광사|송광사(松廣寺)]] 제2세인 [[혜심|진각국사(眞覺國師)]]가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라 [[강진 월남사|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소실되고 이후 복원되지 않아 17세기 중반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ref>이영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958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절터 안의 백제계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법당터의 전면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 최근에 현 모전석탑 서측(向左)의 민가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는데, 현 석탑의 주변에서 수습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월남사지에는 원래 2기의 석탑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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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삼층석탑(三層石塔)]]과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가 있다. 최근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삼층석탑]] 근처 민가에서 석탑의 지붕돌이 발견되었는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원래는 석탑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C%A7%84_%EC%9B%94%EB%82%A8%EC%82%AC%EC%A7%80 강진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로 보아 삼층석탑 외에 다른 석탑 하나가 더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발견된 옥개석의 세부 기법이 삼층석탑 양식과 다른 신라의 양식과 기법을 따르고 있어,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은 절터에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9267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혜심|진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진각국사비]]는 비석의 위쪽이 깨져 없어졌고, 앞면 일부도 떨어졌으나 남아 있는 바닥돌과 거북의 기세, 비석의 폭으로 보아 매우 웅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금당터 초석, 축대가 남아있으며, 옛 기와, 청자, 백자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C%A7%84_%EC%9B%94%EB%82%A8%EC%82%AC%EC%A7%80 강진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현 모전석탑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월남사지석비가 있다. 이 비는 이규보가 비문을 지은 진각국사비로, 현재 비신 일부가 완전히 떨어져나간 상태이나 기단부의 귀부(龜趺)는 완전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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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사지의 전체 규모는 면적이 상당했던 듯하다. 현재 외곽 담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 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한다.<ref>이영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958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월남사지의 전체 규모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였던 것 같다. 현재 외곽 담장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데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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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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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국사 혜심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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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h.aks.ac.kr/Encyves/Graph/D024/stele_hyesim_wollamsaji.htm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지식관계망]
  
가람배치 형식은 전체적으로 보아 완만한 경사지를 4개의 단으로 만들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들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좌우측으로도 5개의 단을 두어 각각의 단에 대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축선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건물과 다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남사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뿐이다. 그중 기와류는 문양·태토(胎土)·소성도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유물은 극소수이고 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를 이룬다. 자기류도 완·접시·병·대접 등 다양하게 수습되었는데,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들이다.
 
[민백]
 
 
월남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월남사터이다.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시대에 진각국사(1178∼1234)가 세운 것으로 되어있지만, 경내 삼층석탑의 규모나 양식으로 보면 그 이전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폐사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으나 이 일대의 절이 정유재란 당시 병화로 소실되고 '무위사'만 남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양쪽편으로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가 있다. 최근에 삼층석탑 근처 민가에서 석탑의 지붕돌이 발견되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는 2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발견된 지붕돌의 세부기법이 월남사터에 있는 백제계 양식인 삼층석탑과는 다른 신라계 양식의 기법이라는 점이다. 한 절터에서 백제계 석탑과 신라계 양식의 석탑이 함께 자리하게된 이유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진각국사를 기리기 위해서 세운 진각국사비는 비석의 위쪽이 깨져 없어졌고, 앞면 일부도 떨어졌으나 남아있는 바닥돌과 거북의 기세, 비석의 폭으로 보아 매우 웅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금당터 초석, 축대가 남아있으며, 옛 기와, 청자, 백자조각이 츨토되고 있다.
 
[위키]
 
 
1988년 12월 2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3,106㎡이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월남사재월출산남고려승진각소창유이규보비(月南寺在月出山南高麗僧眞覺所創有李奎報碑:월남사는 월출산 남쪽에 있는데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하였고 이규보가 찬한 비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 후기에 창건된 듯하나 언제 폐찰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동국여지지》에 ‘진각소창유이규보찬비금폐(眞覺所創有李奎報撰碑今廢)’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동국여지지》를 쓸 당시(1649∼1659) 이미 월남사는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인근에 있는 무위사의 사적기에 임진왜란 때 주변의 절이 모두 불타 사라졌다는 내용이 있어 월남사도 이때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지(金堂址)에는 월남사의 건물 초석과 기단으로 보이는 축대가 남아 있으며, 마을 어귀의 돌담장 근처에서 기와편과 청자·백자편, 탑재로 쓰인 직사각형의 판석들이 발견되었다. 1980년대 중반 모전석탑 우측에 있는 어느 민가의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다.
 
 
지역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월남사지에는 원래 2개의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모전석탑과 또 하나의 석탑이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발견된 옥개석의 세부 기법이 모전석탑 양식과 다른 신라의 양식과 기법을 따르고 있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은 절터에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였던 것이다.
 
 
기록대로 진각국사가 창건하였다면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모전석탑의 조성시기 또한 13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9)과 같은 백제계 탑들이 고려 초기부터 나타났음을 감안하면 진각국사에 대한 기록은 당시 월남사의 중창일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민가가 있으며 마을 입구 양쪽에 월남사지 모전석탑(보물 298)과 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가 있다.
 
[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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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C%A7%84_%EC%9B%94%EB%82%A8%EC%82%AC%EC%A7%80 강진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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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958 월남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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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1일 (목) 23:07 기준 최신판

강진 월남사지
(康津 月南寺址)
대표명칭 강진 월남사지
영문명칭 Wollamsa Temple Site, Gangjin
한자 康津 月南寺址
주소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54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
문화재 지정일 1988년 12월 21일
관리자 강진군
건립시기 고려시대
창건자 혜심(慧諶)
경내문화재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정의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절터.

내용

1988년 12월 2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3,106㎡이고 월출산을 배경으로 월남마을 중앙에 있다.[1]

월남사(月南寺)의 창건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려승 진각초창 유이규보비(高麗 僧眞覺初創 有李奎報碑)’라 하여 송광사(松廣寺) 제2세인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라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소실되고 이후 복원되지 않아 17세기 중반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2]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양쪽으로 삼층석탑(三層石塔)진각국사비(眞覺國師碑)가 있다. 최근 삼층석탑 근처 민가에서 석탑의 지붕돌이 발견되었는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원래는 석탑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3] 이로 보아 삼층석탑 외에 다른 석탑 하나가 더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발견된 옥개석의 세부 기법이 삼층석탑 양식과 다른 신라의 양식과 기법을 따르고 있어,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같은 절터에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이 공존하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4] 진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진각국사비는 비석의 위쪽이 깨져 없어졌고, 앞면 일부도 떨어졌으나 남아 있는 바닥돌과 거북의 기세, 비석의 폭으로 보아 매우 웅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금당터 초석, 축대가 남아있으며, 옛 기와, 청자, 백자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5]

월남사지의 전체 규모는 면적이 상당했던 듯하다. 현재 외곽 담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 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한다.[6]

지식관계망

  • 진각국사 혜심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진 월남사지 강진 월남사 A는 B의 터이다 A edm:isRelatedTo B
강진 월남사 혜심 A는 B가 창건하였다 A ekc:founder B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강진 월남사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혜심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강진 월남사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각자료

영상

주석

  1. "월남사지", 『두산백과』online.
  2. 이영문, "월남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강진 월남사지", 『위키백과』online.
  4. "월남사지", 『두산백과』online.
  5. "강진 월남사지", 『위키백과』online.
  6. 이영문, "월남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