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강대운-진주성싸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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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재===
 
===작품 소재===
해당 작품은 [[진주전투|1차 진주전투]]를 소재로 하는데, [[진주전투|1차 진주전투]] 기간인 1592년 10월 5일부터 11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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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소재인 [[진주전투|1차 진주전투]]는 1592년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이어졌는데, 해당 작품은 5월 10일의 전쟁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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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10일에 왜군은 2대로 나누어 1대는 북문 밖으로 쳐들어오고 1대는 동문을 공격해 왔다. 이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르면서, 그 뒤에 기병 1,000여 명이 조총을 난사하며 돌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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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은 동문 옹성(甕城)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죽을 힘을 다해 활·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졌다. 또한 끓는 물을 붓거나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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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과 목사의 군관 이눌(李訥)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3대첩(三大捷)의 하나로 큰 전과를 올린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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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주요 공격 지점이었던 동문과 북문을 두축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각종 무기로 반격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싸움]]에서 왜군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와 나무 방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작품의 여러 곳에서 대나무 엮은 것을 방패로 삼아 성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는 왜군과 사다리를 타고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적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김시민]] 장군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기(軍旗)를 여럿 세워 병력을 많아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걸었는데, 그림에서도 성안에 노랑,파랑,적색의 수 많은 용대기들이 나부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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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절벽으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절벽으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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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적군은 3개 부대로 나누어 1대는 동문 밖 순천당(順天堂) 산 위에 진을 치고 성을 내려다보며, 1대는 개경원(開慶院)에서 동문을 지나 봉명루(鳳鳴樓) 앞에 진을 치고, 또 1대는 향교 뒷산에서 똑바로 순천당을 지나서 봉명루 앞에 있는 적군과 합세하였다. 왜군의 조총수들은 성 안으로 총포를 난사하였다. 그리고 초막을 짓고 밤에는 불을 피워 기세를 올렸다.
 
그날 밤 곽재우(郭再祐)는 심대승(沈大升)을 보내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향교 뒷산에 올라갔다. 그 곳에서 횃불을 들고 뿔피리를 불면서 적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7일 적은 하루 종일 총탄과 화살을 발사하였다. 8일에는 공격용 죽제(竹梯)와 3층이나 되는 누대(飛樓)를 만들어 침공해 왔다.
 
이에 김시민은 현자포(玄字砲)를 발사하고, 적이 성의 못[城濠]을 메우려고 모아 놓은 솔가지와 죽제를, 짚으로 묶은 화약에 불을 붙여 던져 불살랐다. 또 이동하는 적의 누대를 자루가 긴 도끼와 낫으로 부수면서 적을 무찔렀다.
 
  
10일 사경(四更) 초에 적군은 2대로 나누어 1대는 북문 밖으로 쳐들어오고 1대는 동문을 공격해 왔다. 이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르면서, 그 뒤에 기병 1,000여 명이 조총을 난사하며 돌진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은 동문 옹성(甕城)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죽을 힘을 다해 활·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졌다. 또한 끓는 물을 붓거나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과 목사의 군관 이눌(李訥)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3대첩(三大捷)의 하나로 큰 전과를 올린 싸움이다.
 
  
  

2017년 4월 16일 (일) 16:47 판


진주성싸움
강대운-진주성싸움(김시민)-1975s.jpg
작가 강대운
제작연도 1975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전쟁
분류 유화
소장처 미상


설명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1차 진주전투를 다룬 작품으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의 지휘하에 3,800명의 관군과 2만여명의 백성들이 진주성을 공격하던 왜군을 격파하여 곡창지대인 호남 진출을 막아낸 장면을 담았다.

설명

작품 소재

작품의 소재인 1차 진주전투는 1592년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이어졌는데, 해당 작품은 5월 10일의 전쟁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592년 5월 10일에 왜군은 2대로 나누어 1대는 북문 밖으로 쳐들어오고 1대는 동문을 공격해 왔다. 이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르면서, 그 뒤에 기병 1,000여 명이 조총을 난사하며 돌진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은 동문 옹성(甕城)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죽을 힘을 다해 활·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졌다. 또한 끓는 물을 붓거나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과 목사의 군관 이눌(李訥)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3대첩(三大捷)의 하나로 큰 전과를 올린 싸움이다.

왜군의 주요 공격 지점이었던 동문과 북문을 두축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각종 무기로 반격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싸움에서 왜군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와 나무 방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작품의 여러 곳에서 대나무 엮은 것을 방패로 삼아 성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는 왜군과 사다리를 타고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적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김시민 장군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기(軍旗)를 여럿 세워 병력을 많아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걸었는데, 그림에서도 성안에 노랑,파랑,적색의 수 많은 용대기들이 나부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절벽으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왜군하단의 중앙에는 일본의 전통 투구인 가부토를 쓴 귀신 모양을 한 왜장이 한손에 흰 빛의 일본도를 치켜 들고 있다.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였으나,



작품 배경

작품의 배경은 진주성으로,

작품 상단 왼쪽 끝에는 푸른 색으로 칠해진 남강이 보이고, 왜군의 주요 공격 지점이었던 동문과 북문을 두축으로 성을 공격하는 적군에 대항하여 각종 무기로 반격하는 조선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싸움에서 왜군은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와 나무 방패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작품의 여러 곳에서 대나무 엮은 것을 방패로 삼아 성을 향해 조총을 발사하는 왜군과 사다리를 타고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적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김시민 장군은 백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기(軍旗)를 여럿 세워 병력을 많아 보이게 하는 심리전을 걸었는데, 그림에서도 성안에 노랑,파랑,적색의 수 많은 용대기들이 나부끼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작품 구도

일반적인 민족기록화는 주요 장수나 아군을 중앙에 배치하여 중심으로 삼고 아군의 시점에서 적군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추격하는 구도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경우 원근감을 이용하여 화폭을 상하로 이등분하여 작품 하단에 적군을 배치하였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전경과 중경을 격퇴당하는 적군의 모습으로 가득 채우고 이를 검은 색의 거친 윤곽선과 전체적인 붉은 톤으로 묘사함으로써 보는 이의 긴장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널려있는 적군의 시체, 총포의 폭음과 인마(人馬)의 절규로 가득한 아비규환의 상황은 잔혹한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반감(反感)이나 비애가 아닌 적의 파멸을 통한 아군의 승리를 역으로 강하게 전달한다.[1]

시각적 안내

영규조헌정창섭 「조헌선생의 금산전투」 1976
이 그림에 대한 정보

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시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강대운 강대운-진주성싸움 A는 B를 그렸다 1975년
강대운-진주성싸움 진주성싸움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강대운-진주성싸움 진주성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시간정보 내용
1975년 강대운이 강대운-진주성싸움를 제작하였다.
1991년 11월 30일-1992년 11월 29일 육군 제1군 사령부가 강대운-진주성싸움를 대여하였다.
1592년 8월 조헌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
1592년 8월 영규대사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876635 127.9310766 강대운-진주성싸움이 육군 제1군 사령부에 대여되었다.

그래프

참고문헌

  •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3년, 92-93쪽.
  • 대한민국국회의원동우회, 『민족기록화 전승편』,1981년, 104-108쪽.

주석

  1.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