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
최충(崔沖) | |
대표명칭 | 최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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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崔沖 |
영문명칭 | Choe Chung |
생몰년 | 984(성종 3)-1068(문종 22) |
본관 | 해주(海州) |
시호 | 문헌(文憲) |
호 | 성재(惺齋), 월포(月圃), 방회재(放晦齋) |
자 | 호연(浩然) |
시대 | 고려 |
대표저서 | 『최문헌공유고』 |
부 | 최온(崔溫) |
정의
고려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내용
성장배경
최충은 어릴적부터 교육정책의 혜택을 풍부하게 받으며 성장했다. 최충이 어린시절을 보냈던 황해도 해주는 고려 최초의 지방행정 조직으로 설치된 12목 중의 하나로서 지방 교육의 중심지였는데 그의 아버지 최온(崔溫)은 이 지역의 향리였다. 당시 성종은 지방 향리 자제들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정책을 폈는데, 이는 그들을 관리로 등용해 중앙의 귀족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이러한 성장배경은 최충이 비록 향리 출신이었지만 이후 중앙집권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교육을 통해 지방세력을 중앙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훗날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스스로 학교를 만들어 학문 진흥에 힘쓰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1]
관료 생활
1005년(목종 8) 22세의 나이로 문과 장원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1011년(현종 2)에는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현종 4)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된 역대 문적을 재편수하는 작업을 담당하였고,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七代實錄)》편찬에 참여했다.
[2]
1037년(정종 3) 《현종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1047년에는 서북로병마판사(西北路兵馬判事)로 변경에 나가 진을 설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1026년(현종 17) 태자와 관련된 관직을 연속하여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이들 관직은 태자의 책봉이나 결혼과 같은 의식을 주관하고, 태자의 교육 등을 담당하였다. 이때 겪은 교육의 경험이 훗날 최충이 학교를 설립할 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3]
1047년(문종 1) 문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치고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050년(문종 3)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로서 농번기에 공역 금지와 재정낭비를 방지하기 위한 상소를 올렸고 동여진에 대한 대비책을 건의하여 국방을 강화하였다.
1053년(문종 7)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이를 만류하는 조서와 함께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이라는 벼슬과 상주국(上柱國)이라는 훈작을 받았다.[4]
1055년(문종 9) 내사령(內史令)으로 은퇴하여 집에 있게 된 후에도 군국의 대사는 모두 그를 찾아가서 자문할 정도로 최고의 원로대신으로 추앙받았다.
교육과 인재양성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송악산 아래에 사학을 열어 인재를 양성했다. 그는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방의 이름을 악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율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로 지어 구재(九齋)로 나누고, 과거시험 합격을 위한 구경삼사(九經三史)를 교육시켰다. 9경 3사가 어떤 과목이었는가 하는 부분에서는 학계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대개 9경은 주역∙서경∙시경∙의례∙주례∙예기∙춘추좌씨전∙공양전, 3사는 사기∙한서∙후한서인 것으로 보고 있다.[5]
그가 사학을 운영하던 당시 개경에는 사학십이도라는 이름난 사숙(私塾)이 있었는데, 최충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은 그 가운데서도 성황을 이루어 과거에 급제하는 생도가 많았다. 문종 초는 거란 침입의 전화가 아문 뒤, 세상은 태평해졌지만 아직 국학(國學)은 유명무실이고, 향학도 갖추어지지 못한 때였으므로 교육의 새바람이 점차 요구되던 시기였다. 특히, 문반 현직자를 우대하면서 그들 중심의 국가질서가 정착되고 있었으며, 또 왕실·외척이 세력을 부리게 됨에 따라 이들과 대결하려면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열자, 문전성시를 이룬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이다.[6]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학인 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최충의 벼슬 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컬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렸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고려사》 열전 최충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종(顯宗) 이후 전쟁이 겨우 멈추었으나 학문으로 교화하기[文敎]에는 미처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최충(崔冲)이 후진들을 모아 부지런히 가르치니, 학도들이 줄지어 모여들어 거리에 차고 넘쳤다. 마침내 9재(齋)로 나누었는데, 이르기를 낙성재(樂聖齋)·대중재(大中齋)·성명재(誠明齋)·경업재(敬業齋)·조도재(造道齋)·솔성재(率性齋)·진덕재(進德齋)·대화재(大和齋)·대빙재(待聘齋)라 하고, 이를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라고 불렀다. 무릇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제는 반드시 먼저 학도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매년 여름에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방(僧房)을 빌려 여름 공부[夏課]를 하였는데, 생도 가운데 급제하고 학문은 우수하나 아직 관직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을 택하여 교도(敎導)로 삼아 9경(經)‧3사(史)를 가르치게 하였다. | ||
출처: 『고려사』95 열전 권 제8, 제신, 최충전[7] |
사후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그의 시문은 별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무신란 이후 문신이 많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의 비문과 직산 홍경사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다.
지식 관계망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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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 | 최충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주석
- ↑ 김용선,「최충의 활약과 가문의 번성」, 한국사 시민강좌, 제39집, 2006, 25~29쪽.
- ↑ "최충",
『두산백과』online . - ↑ 김용선,「최충의 활약과 가문의 번성」, 한국사 시민강좌, 제39집, 2006, 32쪽.
- ↑ "최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충", 정성희,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최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고려사』95 열전 권 제8, 제신, 최충전, 온라인 참조: "최충이 9재학당을 설치하여 학생들을 교육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