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이승훈(李昇薰) | |
대표명칭 | 이승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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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昇薰 |
생몰년 | 1864년(고종1)-1930년 |
본관 | 여주(驪州) |
호 | 남강(南岡) |
출생지 | 평안북도 정주 |
시대 | 근대 |
상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성격 | 독립운동가, 교육자 |
목차
정의
한말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이다.
내용
무역업으로 부호가 되다
빈한한 서민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1878년부터 본격적으로 상인의 길을 밟아, 1901년 평양에 진출하여 본격적으로 무역업을 시작하였다. 진남포에 지점을 설치하고, 서울·인천을 왕래하며 사업에 성공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다.[1]
오산학교 설립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安昌浩)의 강연을 들은 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금연·금주와 단발을 결행하고,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였다.
평양에서 용동으로 돌아와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설립하였고,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인 오산학교(五山學校)를 개교해 교장이 되었다.[2]
105인 사건으로 체포
교육사업에 헌신하면서 민족운동에 가담하던 중 일제의 간악한 탄압으로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이 해 가을에 105인 사건이 일어나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임치정(林蚩正) 등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잡히고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윤치호 등과 함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였다.[3]
3.1운동과 그 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석방되었다. 그 해 일본시찰을 하고 돌아와 총독부와 교섭하여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물산장려(物産奬勵)운동과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여 재직하던 중 사망하였다.[4]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이승훈 | 안창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신민회 | 이승훈 |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 A foaf:member B |
신민회 | 안창호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오산학교 | 이승훈 |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 A ekc:founder B |
이승훈 | 안악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승훈 | 105인 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김호일, "이승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승훈",
『독립운동가』online , 국가보훈처. - ↑ 김호일, "이승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승훈",
『doopedia』online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