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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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량(黃俊良)
대표명칭 황준량
한자표기 黃俊良
생몰년 1517-1563
본관 평해(平海)
금계(錦溪)
중거(仲擧)
출생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豊基邑)
시대 조선
국적 조선
황치(黃觶)
황한필(黃漢弼)의 딸


정의

내용

생애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손서(孫壻)이다.[1]

활동사항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었으며, 학정(學正), 박사에 이어 전적(典籍)에 올랐다. 1550년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고,『중종실록』,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60년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내다가 1563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醴泉)에서 죽었다.[2] 풍기의 욱양서원(郁陽書院),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이 있다.[3]

학문

성리학에서는 이황의 설을 그대로 계승하여 스승이 기대승(奇大升)과 사칠논변(四七論辨)을 벌일 때,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發)하여 기(氣)가 따르며,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여 이가 따른다는 설을 옹호하였다.[4]
  1. "황준량", 『두산백과』online.
  2. "황준량", 『두산백과』online.
  3. 최승희, "황준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황준량", 『두산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