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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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1월 11일 (토) 17:52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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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수(金君綏)
대표명칭 김군수
한자표기 金君綏
본관 경주(慶州)
설당(雪堂)
시대 고려
대표저서 서요성역, 동도객관, 송광사보조국사비명
대표직함 직한림원, 병마부사, 좌간의대부, 서북면병
김돈중(金敦中)
성격 문신, 학자
유형 인물



정의

고려 후기의 문신.

내용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설당(雪堂). 아버지는 김돈중(金敦中)이며, 할아버지는 김부식(金富軾)이다.[1]

1194년(명종 24) 문과에 장원급제, 이듬해 명종이 문신을 모아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1위로 뽑혔다.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고종 초에 시랑(侍郞)으로서 각 도의 찰방사(察訪使)가 되어 민정을 시찰하였다. [2]

1216년(고종 3) 8월 거란족의 침입으로 5군(五軍)이 편성되자 전군(前軍) 병마부사(兵馬副使)에 임명되었다. 1218년 일단 물러났던 거란족이 다시 군세를 정비해 남하하자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서 조충(趙沖)을 대신해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의 직임을 띠고 파견되었다. 이때 북계(北界)의 군사들을 지휘해 거란족들을 숙주(肅州: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와 영청(永淸: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 등지에서 격파, 적 430여 명을 베고 21명을 포로로 하고, 53필의 말을 얻는 등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3]

이듬해 의주(義州)의 별장(別將) 한순(韓恂)·다지(多智) 등이 방수장군(防戍將軍) 조선(趙宣)과 수령 이체(李棣)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에 임명되어 지모(智謀)로써 적괴(賊魁)의 머리를 베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난을 평정하였으나 오히려 화근이 되어 병마사 김취려(金就礪)의 미움과 관하의 녹사(錄事) 노인수(盧仁綬)의 참소를 받아 상공(賞功) 대신 도리어 한남(漢南: 지금의 경기도 수원)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서북면병마사 재직 중 청백(淸白)과 애민(愛民)으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김군수의 귀양을 몹시 애석히 여겼다.[4]

시문(詩文)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나무를 잘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동문선(東文選)』에 「서요성역(書聊城驛)」·「동도객관(東都客館)」 등의 시가 전하며, 송광사(松廣寺)의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은 1210년(희종 6) 김군수가 공주에 외관으로 나가 있을 때 찬한 것이다.[5]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군수 김부식 A는 B의 후손이다 A ekc:hasDescendant B
김군수 김취려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군수 노인수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김군수 동문선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비 김군수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김돈중 김군수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김부식 김돈중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주석

  1. 윤용혁, "김군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군수",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윤용혁, "김군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윤용혁, "김군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윤용혁, "김군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윤용혁, "김군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군수",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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