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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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징(體澄)() | |
대표명칭 | 체징(體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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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hejing |
생몰년 | 804(애장왕 5)-880(헌강왕 6) |
시호 | 보조선사(普照禪師) |
휘 | 체징(體澄) |
탑호 | 창성(彰聖) |
성씨 | 김씨(金氏) |
출신지 | 웅진(熊津) |
승탑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
승탑비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출가수행
입당유학
귀국 및 활동
입적
체징(體澄)은 804년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방인 웅진(熊津)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물을 관장하는 전설 속의 신(神)인 하백(河伯)과 같이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금발 머리의 아이었다고 전해진다.[1] 체징은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827년(흥덕왕 2) 24세의 나이에 오늘날 충청남도 서산에 위치한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고 있던 염거(廉居)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염거는 신라에 처음으로 선종(禪綜)을 도입한 승려인 도의(道義)의 제자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체징은 도의부터 이어지는 법맥을 전해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2] 837년(희강왕 2) 체징은 동료들과 함께 당나라로의 유학을 떠났으나, 자신이 배웠던 선법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귀국하였다.[3] 이후 체징은 858년(헌안왕 2) 부터 무주(武州) 황학(黃壑)의 난약(蘭若)에 머물렀는데, 당시 왕인 헌안왕(憲安王)은 장사현(長沙縣) 부사(副使) 김언경(金彦卿)을 파견하여 체징을 서울(경주)로 모시고자 하였다. 체징은 여러번 고사하였으나, 거듭된 왕의 요청에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보림사(寶林寺)를 중건하였다. 체징은 880년(헌강왕 6) 77세의 나이로 입적할때까지 도의로부터 이어지는 선법(禪法)을 전파하였다.
관련항목
node | relation | no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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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를 위한 비이다 | 체징(體澄)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 는 -의 승탑이다 | 체징(體澄) |
염거(廉居) | 는 -의 스승이다 | 체징(體澄) |
체징(體澄) | 는 -의 스승이다 | 형미(逈微) |
체징(體澄) | 는 -를 중창하였다 |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 는 -와 관련있다 | 가지산문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지었다 | 김영(金穎)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썼다 |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가 비문을 새겼다 | 현창(賢暢) |
참고문헌
- 곽승훈, 「김영의 보조선사비명 찬술」, 『신라사학보』 제27호, 신라사학회, 2013.4, 197-232쪽.
- 이계표, 「신라 하대의 가지산문」,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7, 1993, 265-294쪽.
- 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3-24쪽.
- 최선희, 「체징과 가지산문 개창」, 『역사학연구』, 호남사학회 25, 2005,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