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자
을유자 (乙酉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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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을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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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乙酉字 |
시대 | 조선 |
관련인물 | 조선 세조, 정난종 |
관련단체 | 간경도감, 교서관 |
관련유물유적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언해 |
목차
정의
을유자(乙酉字)는 1465년에 정난종(鄭蘭宗)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만든 동활자이다.[1]
내용
불경 간행을 위한 활자
세조는 즉위 10년에 원각사(圓覺寺)를 짓기 시작하는 한편,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에게 명하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을 교수(校讎)하게 하고, 다시 이를 인출하기 위하여 '을유자를 주조하게 했다. 또한 한글로 구결(口訣)을 달기 위하여 한글활자도 만들었는데, 이것은 '을유한글자'라 한다. [2]
을유자에 대한 기록
을유자의 주조 사실은 『세조실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김종직(金宗直)이 쓴 갑진자(甲辰字) 주자발(鑄字跋)에 "을유자는 그 자체가 단정하지 못하고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쓸 수 없다."라는 간단한 기록이 보인다. 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세조 11년에 『원각경』을 인출하고자 정난종에게 자본을 쓰게 하여 주조한 활자가 을유자인데, 그 자체가 매우 고르지 않다."라고 기록되어 있다.[3]
특징
정난종은 송설체(松雪體)의 해서(楷書)에 능하여 창덕궁(昌德宮) 안의 여러 전문(殿門)의 편액 또는 봉선사(奉先寺)의 종명(鐘銘) 등을 썼던 당대의 명필가였다. 그러나 이 송설체의 글자가 진체(晋體)처럼 해정(楷正:글씨체가 바르고 똑똑함)하지 못하여, 그 글자체를 바탕으로 주성한 을유자도 단정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484년(성종 15)에 갑진자를 새로 주조할 때 녹여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을유자는 글자 모양이 단정하지 않아 인쇄하기를 꺼려 하였고, 겨우 20년밖에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 인본(印本)이 많지 않다.[4]
을유자가 사용된 판본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구결원각경(口訣圓覺經)』을 비롯하여 육경합부(六經合部) 중의 『금강경계청(金剛經啓請)』·『보현행원품(菩賢行願品)』·『관세음보살예문(觀世音菩薩禮文)』 합편, 『벽암록(碧巖錄)』·『병창설(兵將說)』·『당서(唐書)』 등이 있을 뿐이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을유자 | 정난종 | A는 B에 의해 제작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을유자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언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465년 | 정난종에 의해 을유자가 제작되었다 |
주석
- ↑ 심우준, "을유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심우준, "을유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심우준, "을유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심우준, "을유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심우준, "을유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영리, 「朝鮮時代 活字本 佛書 硏究」,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 송일기·정왕근, 「조선시대 금속활자본 불교서적의 서지적 연구」, 『한국문헌정보학회지』 제49권, 한국문헌정보학회, 2015.
- 단행본
- 여승구 외, 『(아나로그에서 디지털세계를 연) 한국 고활자의 세계 : 화봉문고창립50주년기념전시회』, 화봉문고,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