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암
이정암(李廷馣) | |
대표명칭 | 이정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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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李廷馣 |
생몰년 | 1541년-1600년 |
본관 | 경주(慶州) |
시호 | 충목(忠穆) |
호 |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 |
자 | 중훈(仲薰) |
출생지 | 서울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상례초,독역고,서정일록 |
대표직함 | 병조참판,충청도관찰사 |
부 | 이달존(李達尊) |
유형 | 문신 |
정의
임진왜란 때 황해도 연안읍성에서 왜군을 격파한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때 이조참의로 선조를 호종하였으나 관직이 교체되어 소임이 없게되자 아우인 개성유수 이정형과 개성을 방어하였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하였다. 이에 이정암은 황해도에서 격문을 돌려 5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였고 조정으로부터 황해도초토사(黃海道招討使)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에(1572) 부사로 재직한 연안부로 들어가 해주로 향하는 왜군을 저지하기로 하고 연안성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8월 28일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5,000여명의 왜병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끊는 물과 불망망이 등으로 왜군을 막아내며 주야 4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해 우마 90여필과 군량미 130여석을 노획하였다. 그 공으로 이정암은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6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했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었다.
1604년 연안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연안 현충사에 제향되었다.
이보다 앞서 임진(臨津)이 무너지자 8월 22일에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이 의병 5백여 명으로 텅빈 연안성(延安城)에 들어가 웅거하고 있으면서 흩어진 사람들을 부르고 군량을 모으며 병기를 수선하여 대대적인 거사를 도모하고 있었다. 28일에는 해주와 강음(江陰)의 왜적 약 3천여 명이 성 아래로 진격해 와서 사면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주야로 막아 지키는데 병기가 갖추어지지 않아 적군이 혹 성을 타고 오르면 성안의 군사들은 목석(木石)을 던졌다. 적군의 사상자는 그 숫자를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고 우리 군인은 31명이 사망했다. 9월 2일에 적이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정암이 수급 18급(級)을 베고 소와 말 90여 필과 군량 1백 30여 석을 빼앗았음을 보고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정암의 훈련되지 않은 외로운 군대로 힘을 다해 한 성을 지켜 적의 예봉을 막고 한 고을의 성지(城池)를 끝까지 보전하였으니 그 공이 큽니다. 물정(物情)이 모두들 칭송하니 중상(重賞)을 내려 격려하소서. 또 순찰사(巡察使)를 겸하도록 명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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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강에서 초토사 이정암이 왜적과 싸워 공을 세우자 비변사가 상을 청하다", |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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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암 | 연안성싸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정암 | 이몽학의 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이정암 | 연안 현충사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이정암 | 이정형 | A는 형제 B가 있다 | A ekc:hasBrother B |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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