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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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9월 3일 (일) 01:11 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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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守眉)
BHST Monk1.png
대표명칭 수미
한자 守眉
생몰년 미상-미상
묘각(妙覺)
법명 수미(守眉)
성씨 최씨(崔氏)
출신지 영암(靈巖)
승탑비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 도갑사수미왕사비



정의

조선 전기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수미(守眉)는 전라남도 영암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가계와 정확한 생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1]

Quote-left.png 스님의 휘는 守眉이고, 속성은 崔氏니 옛 朗州 출신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0쪽.


탄생설화

이인(異人)이 어머니에게 구슬을 남기고 가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2]

Quote-left.png 어머니의 꿈에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구슬을 전해받는 胎夢을 꾸고 잉태하여 태어날 때에는 특이한 香氣가 방 안에 가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0쪽.


출가수행

13세가 되던 해에 월출산 도갑사로 출가하였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3]

Quote-left.png 어릴 때부터 英特하여 항상 世俗을 멀리하려는 超然한 뜻을 품고 있다가 13살 때, 낭주의 西쪽에 있는 月出山 道岬寺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0쪽.


활동

처음에는 교학(敎學)에 뜻을 두고 불경을 강(講)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서 신미(信眉)를 만나 함께 대장경(大藏經)을 읽고 율(律)을 익혔다. 그러나 교학과 계율을 공부하는 것이 아무리 훌륭한 인물화를 그려도 생명력이 없는 것과 같음을 깨닫고 참선(參禪)에 뜻을 두게 되었다.[4]

Quote-left.png 諸方講院으로 다니면서 三藏을 연마하였다. 俗離山 法住寺로 가서 信眉 라는 沙彌스님을 만났는네, 뜻밖에 나이도同甲이고 또한 이름도 같았다. 그와 함께 如琢·如磨·如磋·如切히 대장경을 읽고, 毗尼를 익혔다. 그리하여 점점 慈容과 道骨과 眉彩가 뚜렷이 드러났으며, 詞氣와 음성이 朗潤하고, 辯才가 걸림이 없어서 學者들이 모두 그들을 두 甘露門이라고 推仰하여 頭角이 점점 세상에 드러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同學에게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하여야할 本分事를 등지고 있는 것이 마치 僧繇스님이 人物을 잘 그려서 비록 뛰어난 妙畵라고는 하지만, 마침내 살아 있는 자가 아닌 것과 같다’고 말하고, 드디어 배우던 學問을 그만두고, 雨傘으로 사용하는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禪窟에 出入하기 시작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20-321쪽.


구곡각운(龜谷覺雲)의 지도를 받았고, 뒤에 정심(正心)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5]

세조가 즉위하면서 기존의 억불 정책이 완화되고 불교 진흥 정책이 취해졌는데, 이때에 수미는 판선종사(判禪宗事)가 되어 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6]

1457년(세조 3)에 도갑사로 돌아와서 황폐화된 절을 중수하고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 3구(軀)를 조성하였으며 학승(學僧)들을 모아 지도하였다.[7] 세조가 왕명으로 문도인 홍월(洪月)에게 불사를 주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응 대군(永膺大君)이 시주(施主)가 되어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8]

1458년에는 왕명으로 경차관(敬差官) 윤찬(尹贊)·정은(鄭珢)을 도와 해인사대장경 50부를 인출하였다. 그 뒤 신미와 함께 선도(禪道)를 홍포하고자 완산(晥山)과 몽산(蒙山) 등의 법어(法語)를 해석하고 한글로 번역하였다.[9]

1459년(세조 5)에는 『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대장경의 인출과 『월인석보』 간행은 세조의 의지에 의해 추진된 불사로서, 이 역시 수미와 조선 왕실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 준다.[10]

도갑사 중창 이후 수미는 이곳에 머물며 종풍을 크게 선양하였다. 세조는 이에 묘각(妙覺)이라는 법호와 자색 가사(紫色袈裟)를 하사하고 왕사로 책봉하였다. 이는 태조(太祖) 대의 무학(無學)과 더불어 조선 전기의 드문 왕사 책봉 사례로서, 세조 대 불교 중흥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11]

입적

입적한 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당시 나이 63세, 법랍(法臘) 51세이었다.[12]

도갑사 수미 왕사비에 의하면 도갑사 동쪽 산기슭에 행덕을 기록한 비와 함께 부도탑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이에 따라 수미의 부도가 도갑사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도갑사에 있는 14기의 부도 중 수미 왕사의 것으로 확인된 부도는 없다.[13]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도선 수미 양대사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400-455쪽.
  • 이지관, "영암 도갑사 묘각화상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312-340쪽.
  • "도갑사도선수미양대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도갑사묘각화상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김위석, "수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수미",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최연식, "수미", 『디지털영암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