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첨
강민첨(姜民瞻) | |
대표명칭 | 강민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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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姜民瞻 |
생몰년 | 963년(광종 14)-1021년(현종 12) |
본관 | 진주(晉州) |
시대 | 고려 |
정의
고려 전기의 장군.
내용
강민첨(姜民瞻)은 고려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志氣)가 있고 강하고 과감하여 주로 전공을 통하여 입신하였다. 1012년(현종 3) 5월에 동여진(東女眞)이 영일(迎日)·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병(州郡兵)을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1016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으며, 1018년에는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하자 대장군으로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鷹揚上將軍柱國)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올라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병부상서(知中樞事兵部尙書)가 되었다. 죽은 뒤에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강민첨의 공로로 아들 강단(姜旦)에게도 녹자(祿資)를 가하였다. 문종 때 공신각(功臣閣)에 올랐다.[1]
관련 문화유산
충청남도 예산에 강민첨의 묘소가 남아있다. 경상남도 하동에는 강민첨이 심었다고 전하는 두양리 은행나무와 사당인 두방영당(斗芳影堂), 재실인 두방재(斗芳齋)가 있으며, 영당 입구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또한 하동에는 강민첨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함께 하동을 지날 때 구 시장터에서 머물렀는데, 모기가 너무 많아 모기에게 호통을 치자 모기가 없어졌다는 설화가 전한다.[2]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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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첨 | 강감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강민첨 | 소배압 | A는 B와 대립하였다 | |
강민첨 | 귀주대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강민첨 | 거란침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강민첨장군묘 | 강민첨 | A는 B의 묘소이다 | *온톨로지에 없음: 문화유산-[묘소이다]->인물 |
두양리은행나무 | 강민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두방영당 | 강민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두방재 | 강민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