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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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20일 (일) 23:45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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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대표명칭 허균
한자표기 許筠
생몰년 1569년(선조 2)-1618년(광해군 10)
본관 양천(陽川)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
단보(端甫)
대표저서 『』
허엽(許曄)
강릉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내용

허균(許筠)의 아버지는 허엽(許曄)이고,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이 이복형이다.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허봉(許篈)허난설헌(許蘭雪軒)과 형제이다.[1]

21세인 1589년(선조 22)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94년(선조 27)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59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고,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다가 서울의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 춘추관 기주관(記注官)과 형조좌랑을 거쳐 1602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으며, 이 해에 원접사(遠接使)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었다. 1604년에는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2] 이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3] 1614년(광해군 5)에는 천추사(千秋使)로, 그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4]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5] 1617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적ㅇ로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3년 뒤 조카 사위인 의창군(義昌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 혐의를 받았다. 하인준(河仁俊)·김개(金闓)·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6]

비문의 찬자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주석

  1. 김동욱, "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최호, "허균", 『디지털강릉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동욱, "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최호, "허균", 『디지털강릉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동욱, "허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허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정구복, "김부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