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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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鄭澔)
한국민족대백과
대표명칭 정호
한자표기 鄭澔
생몰년 1648년-1736년
본관 연일(延日)
시호 문경(文敬)
장암(丈巖)
중순(仲淳)
시대 조선
대표저서 장암집
대표직함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배우자 최응천의 딸 강릉 최씨
감찰 정경연
민광환의 딸 여흥 민씨
자녀 판관 정희하, 정순하
능묘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성격 인물
유형 백관



정의

조선 후기의 백관 중 문신으로 노론의 일원이었으며 당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파직되거나 유배당한 일이 많았다.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도제조를 역임하였다.

내용

관직

1682년(숙종 8) 생원이 되었고,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정언이 되었을 때 오도일에게 탄핵을 받았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1] 때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出送)을 당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숙종 20) 인현왕후가 복위될 때 풀려나 지평, 수찬 등을 역임하였으나 1696년 이사상(李師尙)을 논핵하다가 파직되었다. 1698년(숙종 24) 수찬, 집의 등을 거쳐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00년 은을 일본에 판매하여 파직되었다. 다음해 광주부윤으로 기용되었고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가 1710(숙종 36)년 당론을 일삼는다고 하여 흥해, 갑산 등에 유배되었다. 1713년(숙종 39)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宋時烈)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15년 유계(柳稽)의 저술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지었다가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다음해 다시 기용되어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시키고 관작을 추탈시켰다. 1721년(경종 1) 실록청 총재관으로 『숙종실록』 편찬을 담당하였다가 신임사화로 파직되어 유배당했다.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2]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영조 5) 기로소(耆老所)[3]에 들어갔다. 관직생활동안 내내 가난하게 살았다.

학문

송시열의 문하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시문과 글씨에 모두 재능이 있었다. 저서로 『장암집(丈巖集)』과 『문의통고(文義通攷)』가 있다.

사후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에 묘가 있다. 1769년(영조 45) 시호를 받았다.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141호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호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A는 B를 담당하였다
정경연 정호 A는 B의 아버지이다
민광환 정호 A는 B의 외조부이다
여흥 민씨 정호 A는 B의 어머니이다
최응천 정호 A는 B의 장인이다
강릉 최씨 정호 A는 B의 아내이다
정희하 정호 A는 B의 장남이다
정순하 정호 A는 B의 차남이다
정호 장암집 A는 B를 저술하였다
정호 문의통고 A는 B를 저술하였다
정호 누암서원 A는 B에 제향되었다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기사환국(己巳換局) : 1689년(숙종 15) 남인이 희빈 장씨의 소생인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서인을 축출하고 집권한 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사환국
  2. 정미환국(丁未換局) : 영조 초기 탕평책의 일환으로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사건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미환국
  3.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 연로한 관원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로, 본래 이름은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였다가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변경되었고 약칭으로 기로소라 불렸다. 문과 출신 정 2품의 문관으로 70세 이상인 사람이 들어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로소
  4.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 국립중앙박물관, 88쪽.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호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누암서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더 읽을거리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