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영주 비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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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샘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9일 (토) 19:09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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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비로사
(榮州 毘盧寺)
대표명칭 영주 비로사
한자 榮州 毘盧寺
경내문화재 영주 비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영주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영주 비로사 아미타후불탱화, 영주 비로사 진공대사 보법탑비, 영주 비로사 삼가동석조당간지주



정의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진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라고도 불렀다.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진정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3년 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의 소백산 추동이 비로사로 추정된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683년(신문왕 3)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 한 승려가 중창하고 진공을 청해 이곳에서 살게 했는데, 그때 고려 태조가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1126년(인종 4) 인종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 환암이 중창하였다. 1468년(예종 1)에는 김수온이 사재를 들여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석불상 2구만 남고 모두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 경희가 중건하였다. 이어 1684년(숙종 10) 월하가 법당과 산신각 등을 중창하였고 1907년 범선이 요사를 증축하였는데, 1908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 희방사 주지 범선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27년 요사를, 1932년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법당과 요사채뿐이지만, 진공대사보법탑비(경북유형문화재 4)와 석조당간지주(경북유형문화재 7),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996) 등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1]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 진정(眞定)이 창건한 화엄종 절로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小白山寺)라고도 불리었다. 가난으로 인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진정은 의상(義湘)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3년 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산 추동(錐洞)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 환생(還生)했다.”고 하였다 한다. 학계에서는 이때의 소백산 추동이 비로사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683년(신문왕 3)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말에는 한 승려가 중창하고 진공(眞空)을 청하여 이곳에서 살게 하였는데, 그 때 고려 태조가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대사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937년(태조 2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함께 보법(普法)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려주었다. 1126년(인종 4)에는 왕이 김부식(金富軾)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에는 환암(幻庵)이 중창하였다. 세조 때에는 복전(福田) 5명을 두어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였고 1469년(예종 1)에는 김수온(金守溫)이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석불상(石佛像) 2구만이 남고 모두 불타버렸으며, 1684년(숙종 10)에 월하(月河)가 법당과 산신각 등 40여 칸을 중창하였다. 1907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과 사지(寺誌)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1919년에 주지 범선(泛船)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27년에는 요사를 중건하였으며, 1932년에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다. 이 절은 계단식으로 된 전형적인 산간사찰(山間寺刹)로서 현존하는 당우로는 새로 지은 법당과 요사채뿐이다. 그러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인 진공대사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인 영주삼가동석조당간지주, 그리고 보물 제996호인 영주비로사석아미타불 및 석비로자나불좌상 등 신라 말 고려 초의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이환추(李桓樞)가 글씨를 쓴 진공대사보법탑비는 939년(태조 22)에 세워진 것인데, 특히 비신(碑身)의 뒷면에 입적할 때의 유계(遺誡)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9세기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은 현재 법당 안에 있지만, 광배(光背)는 깨어진 채 요사채의 우물가에 있으며, 대좌(臺座)는 법당 앞뜰에 놓여 있다. 그러나 현재 대좌 1구, 광배 1구가 있어 비로자나불상만은 복원이 가능한 편이다. 1572년(선조 5)에 『월인석보(月印釋譜)』가, 1573년에는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義撮要)』가, 1574년에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각각 판각되었다.[2]

비로사(毘盧寺)는 소백산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산사이다. 680년(문무왕 20)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 고찰로서 불상, 당간지주 등의 유물이 남아 있어 이 절의 깊은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맨 먼저 비로사 입구 좌측 위에는 영주삼가등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다.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4.8m 높이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양 지주의 내측면은 평평하고, 전 후면에는 가장자리와 중심부를 따라 띠가 조각되어 있다. 또, 간을 받치는 간대석과 간을 삽입하는 구멍이 있어 전체적으로 치밀한 구조를 보여준다. 비로사 경내에 들어서면, 거북받침 위에 비신을 세운 비석이 하나 눈에 띈다. 바로 진공대사 보법탑비이다. 진공대사는 신라 왕손으로 가야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937년(태조 20)에 고려 태조에게 나아가 후삼국의 통일을 축하하고 열반하였다. 이에 태조는 진공이라는 시호를 태리고, 비로사에 보법탑 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또, 영풍 비로사 석아미타 및 석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말기인 9세기후반에 조성된 불상이다. 석비로자나불좌상은 단정하고 아담한 체구, 둥근 얼굴, 생기있는 어깨선 등에서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석아미타불 역시 석비로자나불좌상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어 동일작가에 의해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귀중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비로사는 소백산 비로봉의 장쾌한 전경과 함께 길손의 기쁨을 더해주고 있다.[3]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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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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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비로사", 『두산백과』online.
  2. 김상현, "비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비로사(영주)",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