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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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의례를 거행하는 제단(祭壇)으로,[1] 1967년 7월 15일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2]

내용

역사

동지(冬至)에는 호천상제(昊天上帝)와 황지기(皇地祗)의 천지신(天地神)을 정위(正位)로 하고, [[황제의 시조(始祖)를 배위(配位)로 하며, 일월성신(日月星辰) 및 풍운뇌우(風雲雷雨)와 국내산천(國內山川)의 신들을 한국고전용어사전 종향위(從享位) 하여 대제(大祭)를 지내고, 원일(元日)에는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대제(祈穀大祭)를 지낸다. 원구단에서의 제사는 [[황제국의 위격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는 태조대에 원구단의 이름을 ‘원단(圓壇)’으로 바꾼 뒤에 세종대까지 기우(祈雨)나 기곡(祈穀)의 제사를 지냈을 뿐, 동지의 천지 제사는 지내지 못했다. 세조대에 잠시 원구단이 조성되어 제천의례를 거행한 적이 있으나 폐지되었다. 대한제국이 성립되던 1897년에 건축되고 1901년에 새롭게 중수되었다. 『대한예전』에는 위치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제도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당시를 기록한 『독립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남별전(南別殿: 중국 사신이 머물던 별궁) 터전에 세워진 환구단은 3층으로 맨 아래 1층은 영척으로 지름이 144척, 2층은 72척, 3층은 36척, 높이는 각각 3척 정도로 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모양이다. 바닥에는 벽돌을 깔고 둥글게 돌과 벽돌로 담을 쌓고 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냈는데, 남문은 셋으로 되었다. 『대한예전』의 그림을 보면, 오른쪽에 3층으로 된 환구단이 있고 사방 4개의 황살문과 그 중 남쪽의 삼문(三門)이 있는데, 맨 위층에는 황막(黃幕)의 덮개가 있다. 왼쪽에 3층으로 된 건물은 황천상제와 황지지(皇地祗), 태조(太祖)의 신위를 모셔놓는 황궁우(皇穹宇)이다. 1897년 8월 16일 고종은 ‘광무(光武)’라는 새 연호를 정하고 환구단에 알리는 고유제를 거행하였다.[3]

현재

1913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처음 조성된 단지는 헐리고, 이듬해 그 자리에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축소되었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종대례의궤 환구단 A는 B와 관련이 있다
황제등극의례 환구단 A는 B에서 거행하였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897년 10월 12일 고종황제등극의례환구단에서 거행하였다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大韓禮典』 卷3, 「吉禮」 ‘瓊廟圖說’.
  2. 문화재청 환구단
  3. 김문식, 김지영 외 4명,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2, 63~65쪽.
  4. 문화재청 환구단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김문식, 「고종의 황제 등극의에 나타난 상징적 함의」, 『조선시대사학보』 37, 조선시대사학회, 2006.
  • 김문식, 김지영 외 4명,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2.
  • 김영태, 『풍년과 국태민안의 기원, 사직단과 환구단』, 태믹스, 2015.
  • 성남경, 「조선시대 원구제에 관한 일고찰」, 대구한의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 이욱, 「근대 제천의례를 통해 본 민족정체성 연구」, 『국학연구』, 국학연구소, 2006.
  • 한영우, 「大韓帝國 성립과정과 《大禮儀軌》」, 『한국사론』 제 45집, 서울대학교, 2001.

더 읽을거리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