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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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영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4일 (월) 17:15 판 (관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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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庚申換局)
대표명칭 경신환국
한자표기 庚申換局
이칭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시대 조선
날짜 1680년
관련인물 명성왕후, 김석주, 조선 숙종, 허적
관련유물유적 한산이씨 고행록
명성대비전유


정의

1680년(숙종 6) 남인(南人)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정치적 사건이다.

내용

환국의 정의

환국이란 주도 정치세력의 급격한 교체로 인한 정국의 대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에 붕당정치론이 수용된 이후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등의 정치 세력이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공존적 협력을 유지하며 정치 운영을 해나갔다. 그러나 숙종대에서 영조대 초반에 걸쳐 서인 대 남인, 노론 대 소론의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져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정국 운영이 이루어졌는데 이 시기의 정치를 환국정치라고 부른다. [1]

숙종대 초반의 정치세력

당시의 대표적인 정치 세력을 나눠보면 송시열송준길을 중심으로 하여 이유태(李惟泰),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의 산당, 김좌명서필원(徐必遠), 이경석(李景奭), 정태화 등의 한당, 원두표(元斗杓), 이후원(李厚源), 이시백(李時白) 등의 대신들을 위시한 일반 관료군, 허적, 오정창(吳挺昌) 등의 남인계 관료군 이렇게 4개의 세력이다. 또 하나의 정치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왕실과 가까운 종실세력과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중심으로 하는 외척 세력이었다. 숙종은 어릴 때부터 ‘삼복(三福)’이라 불렸던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을 총애했기 때문에 이들은 종친임에도 정국의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외가인 남인인 오정창 형제들, 외척인 청풍부원군 세력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인 삼복은 청풍 김씨인 김육(金堉)이 인평대군의 묘지명을 써준 계기로 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다. [2]

예송논쟁 이후

갑인예송의 여파로 송시열이 지나치게 수세에 몰리고 남인들이 큰 세력을 형성해가자, 외척 김석주 측은 남인들을 적절히 제어할 필요를 느꼈다. 숙종마저 송시열을 제외한 나머지 서인 산당 계열을 다시 조정에 부르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외척 세력은 남인 관료군들과는 물론 삼복형제들을 중심으로 한 종친 세력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복창군복평군이 궐내에서 궁녀와 간통했다는 일을 김우명이 상소한 것이었다. 또한 숙종이 한때 병환이 있어 후사 문제를 두고 조정이 뒤숭숭할 때 호위군과 병권의 장악 문제를 두고도 외척과 종친 세력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경신환국이 발생하였다. [3]

경신환국의 발생과 서인의 재집권

경신환국의 발생

1680년(숙종 6) 3월 19일 숙종허적의 조부인 허잠(許潛)에게 시호를 더하여 내려주는 것을 기념하는 잔치에 필요한 물품들을 넉넉하게 내려 주라고 명했다. 그런데 숙종은 허적이 이미 허락도 받지 않고 왕실 물품인 유악을 먼저 가져가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숙종은 크게 화가 났다. 숙종은 공조판서 유혁연(柳赫然),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 신여철(吳始復)을 불러서 유혁연을 해임하고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총융사로 삼는 급작스러운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허적의 세력인 윤휴민암(閔黯)의 삭탈관작과 귀양을 건의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숙종은 별다른 지시 없이 허락을 하였다. 영의정에 김수항, 좌의정에 정태화, 도승지에 남구만(南九萬)을 임명함으로써 서인주도의 정국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삼복형제와 나머지 남인들에 대해서도 유배와 삭탈관작의 조처가 행해졌다. [4]

서인의 재집권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은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나, 곧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의 분립이 진행된다. 그 중 권력의 핵심을 차지한 것은 송시열과 ‘삼척’으로 불렸던 왕실의 외척, 즉 김석주김만기민정중의 연합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9년 뒤 다시 남인계의 후궁 장희빈이 낳은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몰락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 이 때 송시열김수항 등이 사사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는데, 경신환국으로 사사된 허적윤휴는 다시 복권된다. 그리고 다시 5년 뒤에는 희빈 장씨가 사사되는 갑술환국이 일어나 노론과 소론이 재집권하게 된다. [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주석

  1. 김지영,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이민정,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이민정,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이민정,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이민정, "갑술환국",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지두환, 『숙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9.
    • 이건창, 『당의통략 : 조선시대 당쟁(黨爭)의 기록』, 자유문고, 2015.
  • 논문
    • 김현아, 「肅宗代 己巳·甲戌換局期 南人의 執權과 沒落」,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 이상식, 「朝鮮後期 肅宗의 政局運營과 王權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 오경택, 「17세기 政局動向과 南人系 宋尙周의 정치활동」, 『한국학논총』,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