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
혼수(混修) | |
대표명칭 | 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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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Honsu |
한자 | 混修 |
생몰년 | 1320(충숙왕 7)-1392(태조 1) |
시호 | 보각(普覺) |
호 | 환암(幻菴) |
휘 | 혼수(混修) |
탑호 | 편광(遍光) |
자 | 무작(無作) |
성씨 | 조(趙) |
출신지 | 광주(廣州: 현재의 경기도 광주) |
승탑비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혼수의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菴)이다. 혼수의 기록이 남아 있는 문집류에는 환노(幻老) 또는 환옹(幻翁)이라고도 지칭한 사례가 있다.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에 그의 아버지가 부임한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 용궁면(龍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헌부산랑 조숙령(풍양 조씨)이고 어머니 청주 경씨이다.[1] 아버지가 사냥 나갔다가 새끼를 품은 사슴을 만나 사냥을 그만 두고 돌아와 곧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그를 데리고 친가로 돌아왔다. 혼수는 어려서 몸이 약하여 병을 앓았는데 출가하면 건강하고 큰 스님이 될 것이라는 점술사의 예언에 따라 어머니의 추천으로 계송(繼松) 대선사에게 12세 출가한다.[2][3]
혼수(混修)는 1320년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출생하였다. 휘(諱)는 혼수(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이다. 본성은 조씨(趙氏)로서 경기도 광주(廣州) 풍양현(豊壤縣)이 그 본관이다.[4]
출가수행
혼수는 1341년(충혜왕 2)에 선시에 응시하여 상상과에 합격하였다. 이 때 고승 및 유생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이색과 가까이 지냈다. 29세인 1348년(충목왕 2) 가을에 이웃사람이 급사함을 보고 수도에 더욱 정진할 것을 맹서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장좌불와로 정진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어머니가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여 경산(京山, 지금의 경북 성주군)에 주석하며 어머니를 5-6년간 보살피고 어머니가 운명하자 『大字法華經』을 사경(寫經)하여 명복을 빌었다.
1341년 고려 충혜왕 2년에 선시(禪試)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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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5쪽. |
혼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머물고 있는 식영감화상(息影鑑和尙)을 찾아가 『능엄경(楞嚴經)』을 배워 그 진리를 터득하였다. 당시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휴휴암(休休菴)을 새로 짓고 선사를 맞이하여 능엄경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다. 이 법회에서 공민왕이 그의 도를 듣고 회암사 주지를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을 거쳐 오대산의 신성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같은 산내의 고운암에 머물고 있는 나옹 혜근을 찾아가 자주 질의하고 입실을 허락받았다. 그로부터 금란가사와 상아불자 산형주장자를 신물로 받았다.
3년 동안 머물다가 충주(忠州) 청룡사(靑龍寺)로 갔다. 청룡사 서쪽 산기슭에 집터를 고쳐 짓고 연회암(宴晦菴)이란 편액을 걸었다.
고려 공민왕이 회암사(檜巖寺) 주지를 청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금오산을 거쳐 오대산의 신성암으로 거처하였다. 오대산에 머물고 있던 나옹 혜근을 찾아가 자주 도(道)의 요지 질의하니, 혜근(惠勤)은 뒤에 금란가사(金襴袈裟)ㆍ상아불(象牙拂)ㆍ산형장(山形杖) 등 3가지 신물을 주었다.
1361년에 강릉도(江陵道) 안렴사(按廉使)가 혼수를 천거하였으나, 상경 도중에 은둔하여 정진한다. 1369년에 백성군(白城郡) 사람 김황(金璜)이 원찰(願刹)인 서운사(瑞雲寺)[5].에 혼수를 초빙하였다.
활동
공민왕이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선교(禪敎)의 여러 승려를 모아 혜근(惠勤)을 명하여 그들을 시험하게 한 다음, 친히 이를 지켜보았다. 혜근이 한 마디 말을 내어 묻자 여러 승려들은 한 사람도 이에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공민왕은 그만 불쾌하여 자리를 파하려 하였는데, 혼수 선사께서 맨 뒤에 이르러 위의를 갖추고 당문(堂門) 섬돌 아래 서 있었다. 혜근이 “무엇이 당문구(當門句)냐?” 고 물으니, 선사께서 즉시 섬돌에 올라가 “좌측이나 우측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앙 한복판에 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중략) ... (중략) 혜근이 곧 고개를 끄덕이자, 공민왕이 유사(攸司)를 명하여 문답한 구절을 입격문(入格文)으로 만들어 쓰게 하고 종문(宗門)에 머물게 하였는데.... | ||
출처: "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 「비명류」, 『양촌선생문집』 제37권.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한국고전번역원. |
1370년 고려 공민왕이 혜근에게 명하여 회암사에서 공부선(功夫選)을 개최할 때 참여하여 유일하게 인증을 받았다. 1372년에 왕명으로 불호사(佛護寺) 주지로 나아갔고 이듬해 내불당의 주지에 임명되어 있었으나 몰래 도망가 평해의 서산에서 은둔하였다. 결국 1374년 1월에 응하였다. 1375년 가을부터 1376년 3월까지 송광사(松廣社) 주지를 하였다. 서운사로 돌아왔다가 1378년 치악산을 거쳐 다시 연회암에 머물렀는데 얼마 후 광암사(光巖寺) 주지를 3년간 하였다. 그후 주지를 사양하고 원주 백운암(白雲菴)을 거쳐 용문, 평해, 치악산 등의 명산을 돌아다녔다. 1383년 4월에 연회암에서 국사로 책봉받고 충주 개천사를 하산소로 삼았다. 그해 가을 서운사로 석하였는데 왕이 개성으로 불러들여 광암사(光巖寺) 주지로 임명되었다. 1385년 가을 광암사에서 능엄경 법회를 열었다. 1386년에 우왕의 어머니인 대비 안씨가 공민왕을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능엄법회인 불정회를 보국사(輔國寺)에서 개최하였다. 1387년 8월에 수창궁(壽昌宮)에서 소재석(消災席, 재앙의 소멸을 비는 자리)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돌아갈 때에는 이직(李稷)을 딸려보내 존경을 표하였다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개천사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1389년 곧 뒤이어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국사직을 거절하고 치악산으로 들어갔으나 몇달 안되어 다시 국사로 책봉되었다. 1391년 가을에 이성계와 대장경을 발간하여 서운사(瑞雲寺)에 안치하고 회양법회를 열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에게 표문을 올려 축하하였다.
입적
1392년 9월 18일에 유서(遺書)를 쓰게 하면서 문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갈 때가 오늘 저녁이라, 고을의 관원을 불러 인(印)을 봉해야 하겠다.”고 하더니, 저녁때가 되자 앉아서 말하기를 “지금 죽을 때가 되었다. 나는 운명하겠노라.” 하고, 곧 게(偈)[6]를 베푼 다음 묵묵히 시적(示寂)하였다. 춘추가 73세에 하랍(夏臘)이 60세였다.
문인 소안(紹安)이 유서를 받들어 알리니, 태조 이성계가 애도하는 심정에서, 시호는 보각(普覺), 탑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부도(浮屠)를 만들게 하였다. 1393년에 그의 문인들이 부도 곁에 비(碑)를 세우고자 그의 제자 만우(卍雨)로 하여금 행장(行狀)을 찬(撰)하게 하고, 소안(紹安)이 이를 받들어 태조에게 알리니, 태조는 권근(權近)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1394년에 충주 청룡사에 탑비가 세워졌다.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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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 권근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 충주 청룡사 | A는 B에 있다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 혼수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 혼수 | 는 -를 위한 승탑이다 | |
혜근 | 혼수 | A는 B의 스승이다 | |
계송 | 혼수 | A는 B의 스승이다 | |
식영감 | 혼수 | A는 B의 스승이다 | |
혼수 | 만우 | A는 B의 스승이다 | |
혼수 | 소안 | A는 B의 스승이다 | |
혼수 | 희진 | A는 B의 스승이다 | |
혼수 | 불호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송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서운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광암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오대산 신성암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내불당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개천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혼수 | 이성계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이직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공민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창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우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공양왕 | A는 B와 관련있다 | |
혼수 | 목은집 | A는 B에 기록되었다 |
참고문헌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1>", 한국불교, 2006.07.03.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2>", 한국불교, 2006.07.05.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3>", 한국불교, 2006.07.12.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4>", 한국불교, 2006.07.21.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5>", 한국불교, 2006.08.07.
- "환암혼수의 생애와 사상<6>", 한국불교, 2006.08.23.
- 강호선, 「고려말 幻庵混修의 활동과 그 의미」, 『한국선학』 43, 한국선학회, 2016, 5-34쪽.
- 곽승훈, 「고려 말 幻庵 선사의 『護法論』 간행 배포와 그 영향」, 『한국민족문화』 40,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1, 167-199쪽.
-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30-63쪽.
- 황인규, 「幻庵 混修의 生涯와 佛敎史的 位置」, 『경주사학』 18, 경주사학회, 1999, 101-131쪽.
주석
- ↑ 황인규, 105쪽.
- ↑ 황인규, 105쪽.
- ↑ 민백
- ↑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4쪽. "유명 조선국 보각국사비명", 「비명류」, 『양촌선생문집』 제37권.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한국고전번역원.
- ↑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이다. 이지관,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 환암 정혜원융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48쪽. 각주 67
- ↑ 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 "임종게(臨終偈)",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