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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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8월 10일 (목) 18:1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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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奎章閣)
"규장각",『국립중앙박물관』online, 국립중앙박물관.
대표명칭 규장각
한자표기 奎章閣
이칭 내각
유형 관청
창립자 정조
창립시대 조선
창립일 1776
해체일 1910
관련기관 장서각, 조선총독부, 교서관, 홍문관, 예문관, 검서관



정의

규장각은 조선 후기 장서의 인쇄, 보관 및 언론의 역할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내용

설립

규장각은 원래 영조의 어제(御製)를 보관하기 위해 설립한 관청으로서 그 기원은 숙종 대 종부시(宗簿寺) 내부에 작은 전각을 건립하고 친필로 ‘규장각(奎章閣)이라 명명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어제를 봉안하는 장소를 궁궐 안에 두는 것은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것인데, 세조(世祖) 때 송나라의 예에 따라 규장각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숙쫑 대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규장각은 규모나 제도가 갖추어진 기관이 아니라 단지 종부시의 부속건물에 불과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규장각은 정조 대에 세워진 것으로, 정조는 1776년 3월, 즉위 직후 창덕궁 후원(後苑)에 어제존각(御製尊閣)을 건립하게 했다. 처음에는 영조의 어제(御製)를 봉안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하여 어제각(御製閣)이라고 하였다가 이후 규장각(奎章閣)으로 개칭했다. [1]

  • 규장각 설립의 목적

숙종 대 규장각이 어제존각으로서 규모를 갖추지 못한 것은 신료들은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시키는 규장각의 설치를 유신들이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 후 외척 및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의 서립을 추진하였다. 이를테면 단순한 서고의 구실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조가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首建)하였다.”고 설각 취지를 밝힌 데에서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2]
정조는 규장각신을 가장 가까운 신하로 둠으로써 관료기강을 쇄신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즉위 5년 2월 규장각의 기능이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다. 정조가 1781년(정조 5) 3월 전‧현직 각신(閣臣)들과 내각(內閣)의 이문원(摛文院)에서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한 후 각신들에게 정치적 혁신을 위한 보좌를 당부하면서 시상(施賞)했는데, 이는 가까운 신하의 친족으로 인해 해이해진 관료기강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3]

역할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정조대의 규장각은 설립 당시부터 숙종대의 규장각을 넘어서는 큰 규모였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역할을 갖게 되었다. [4]

  • 장서의 보관 및 검토

창덕궁 후원에 위치했던 규장각의 규모를 살펴보면 본각(本閣)인 규장각에 정조의 초상화 및 글‧글씨‧도장 등을 봉안하였고, 서남쪽의 봉모당(奉謨堂)에는 역대 왕들의 다양한 글‧글씨‧그림과 족보, 왕의 치적을 기록한 문서 등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정남쪽의 열고관(閱古館)과 그 북편의 개유와(皆有窩)에는 중국의 서적을, 서북쪽의 서고(西庫)는 우리나라의 서적을 각각 소장하였고, 서쪽의 이안각(移安閣)은 포쇄를 위해 사용하였다. [5] 정서의 보관을 위해 여러 차례 문류 작업히 행해졌는데, 첫 번째 분류 목록은 1781년(정조 5) 약 3만여 권의 중국 책을 대상으로 서호수(徐浩修)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를 ≪규장총목 奎章總目≫이라 하며 이것이 오늘날 규장각도서의 시원(始源)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 책들만을 분류한 것이 『누판고』와 『군셔표기』이다.[6]

  • 장서의 간행

어제와 서적의 소장만을 담당하던 규장각은 원년 12월 제학 서명응(徐命膺)의 건의로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귀속함에 따라 그 업무가 확대되었다. [7] 이에 정유자(丁酉字, 1777년), 한구자(韓構字, 1782년), 생생자(生生字, 1792년), 정리자(整理字, 1795년) 등의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수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간행하였다.[8] 이때부터 규장각은 역대 국왕 관련 기록 및 각종 서적의 인쇄부터 반포‧소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문화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9]

  • 초계문신의 교육

1781년(정조 5) 2월에 확립된 초계문신 교육은 각신의 고유한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초계문신제는 과거를 거친 문신(文臣) 가운데 참상관(參上官)‧ 참하관(參下官)을 막론하고 37세 이하의 사람을 의정부에서 선발하여 40세가 될 때까지 교육하는 제도였다. 이렇듯 관료의 재교육을 실시한 목적은 경학(經學)과 역사(歷史)에 밝은 인재를 주축으로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함이었다. 이들을 내각에서 교육한 까닭은 바로 내각이 정조가 의미하는 인재 양성을 위한 총본산의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내각에서 경전을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초계문신들은 매월 한 번씩 왕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친시(親試)‧친강(親講)을 통해 시험을 봤다. 정조 때의 초계문신은 모두 10회에 걸쳐 138명이 선발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이후 높은 관직에 진출했으며 각신으로도 18명이 진출했다. 그러나 유학적인 정치사상을 관료사회에 부식시키려 했던 정조의 노력과는 달리 정조가 사학(邪學)으로 규정했던 서학(西學)과 패관소품(稗官小品)이 관료사회에까지 침투하고, 심지어는 초계문신 출신인 정약용(丁若鏞)‧ 정약전(丁若銓) 등이 서학에 연루 되는 등 정조의 의도와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조 사후 김조순(金祖淳), 김재찬(金載瓚), 서유구(徐有榘) 등 많은 초계문신 출신 인사들이 19세기의 주도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10]

조직

관원으로 제학 2인, 직제학 2인, 직각(直閣) 1인, 대교(待敎) 1인 외에 검서관(檢書官) 4인이 있었다. 각신들은 삼사보다도 오히려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정되었다. 종1품으로부터 참하관에 이르는 노소 6인과 실무담당으로 검서관 4인을 두었다. 내각에는 검서관 외에 사자관 8인 등이 있었고, 다시 이속으로 70인이 있었으며, 외각에도 이속 20여 인을 두었다. 규모도 1781년까지 계속 정비되어갔는데, 열고관의 도서가 늘어남에 따라, ‘개유와(皆有窩)’라는 서고를 증축하기도 하였다.[11]

변화

  • 역할의 축소

정조대의 규장각은 문풍(文風)을 주도하면서 관리의 선발, 왕명(王命)의 작성, 역사서(歷史書)의 편찬 및 경학(經學) 연구 및 원자(元子)의 교육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정조 시대 중심기관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면서 규장각은 도서를 수장하고 관리하는 기관 정도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고 편찬되는 서적의 양과 질 역시 현저히 떨어졌다. 규장각의 서적을 전란(戰亂)이 일어나도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1782년(정조 6) 강화도에 건립하였던 외규장각(外奎章閣)에 있던 도서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약탈 당했으며, 약탈되지 않은 도서는 전부 불에 타버렸다. [12]

  • 갑오개혁 이후 변천과정

규장각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궁내부(宮內府)의 부속기관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명칭이 규장원(奎章院)으로 바뀌었다가 1897년(고종 34)에 규장각이라는 이름을 회복하였다. 1907년 봉상시(奉常寺), 종부시, 홍문관이 폐지되면서 그 사무가 규장각으로 이관되었고, 이후 규장각은 제실도서(帝室圖書)라는 이름으로 왕실과 각 관청의 도서를 수집하여 관장했다. 1910년 일제의 한국병합으로 규장각이 폐지되고 이왕직(李王職)의 임시도서실, 곧 장서각(藏書閣)에서 규장각 도서를 관리하다가 1911년 조선총독부 산하 취조국(取調局)에서 규장각 도서를 접수하였고, 1912년 취조국이 폐지되고 참사관실(參事官室)이 생겨 이곳으로 규장각 도서가 이관되었다. 1919년 규장각 도서는 학무국(學務局)에서 수장하다 1930년에는 경성제대(京城帝大)에 신축된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규장각 도서들은 이처럼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혼란한 시기, 이관을 거듭하면서 증감을 거듭했다. 1945년 해방 이후 규장각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13]

의의

  • 선도기관과 왕권 강화의 역할

정조가 내각을 설치한 후에 비로소 관각(館閣), 곧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이 갖추어졌다는 말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규장각은 여타 관사(官司)의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한 선도 기관이었다. 정조는 각신을 가까이 두고 문풍(文風)을 일으켜 학문을 진흥시킬 목적으로 규장각신에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그런데 정조에게 학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의리(義理)를 밝히고 유교적 정치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문관(文官)이 학문적 소양이 없고 의리에 어두우면 반드시 나라는 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함으로써 왕조를 다시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14]

  • 신분제 완화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은 모두 서얼(庶孼)에서 임명되었으며 비록 잡직으로 각신의 대열에 들지는 못했지만 그 재능을 인정받는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다. 검서관 직제는 홍국영(洪國榮)이 학문을 높이 여기는 우문정치(右文政治)를 강화하기 위해 학문적 능력이 있는 서얼들까지 규장각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을 건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해 처음 검서관으로 발탁되었던 이들이 바로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였다. 검서관에 서얼을 임명하는 것은 신분제도를 뒤엎는 획기적인 조치는 아니었으나 적자와 서자 간의 불만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과정 속에서 추진된 개혁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검서관 제도는 기존 사회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는 범주에서 문명(文名)은 높으나 관직 진출이 불가능했던 서얼을 청요직에 수용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5]

시각자료

갤러리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서유구|| 규장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정조 규장각 A는 B를 설립하였다 1776년
숙종 규장각 A는 B를 설립하였다 1674-1720년
승정원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홍문관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예문관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서호수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서명응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교서관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1777년
서호수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정약용 규장각 A는 B와 관련이 있다
유득공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박제가 규장각 A는 B에 소속된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74-1720년 시중사 내부에 규장각을 처음 설치하였다
1776년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였다
1777년 교서관이 규장각에 편입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궁내부의 부속기관으로 변경되었다
1895년 규정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897년 명칭이 규장각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1910년 규장각이 폐지되었다
1930년 규장각이 경성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1945년 규장각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주석

  1.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2. 김용덕,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5.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6. 김용덕,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8. 김용덕,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0.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1. 김용덕, "규장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3.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4.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15. 이민아, "규장각", 『한국사컨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강문식, 「규장각 西庫의 운영과 서적 관리 」, 『한국문화』vol.70,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5
    • 배제총, 「조선(朝鮮) 정조대(正祖代)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 『조선사연구』vol.5, 조선사연구회, 1996.

유용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