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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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덕지(崔德之) | |
| 대표명칭 | 최덕지 |
|---|---|
| 한자표기 | 崔德之 |
| 생몰년 | 1384년-1455년 |
| 본관 | 전주(全州) |
| 시호 | 문숙(文肅) |
| 호 | 연촌(烟村), 존양(存養) |
| 자 | 가구(可久), 우수(迂叟) |
| 시대 | 조선시대 |
| 국적 | 조선 |
| 대표직함 |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
| 부 | 최담(崔霮)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내용
개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1]
업적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2]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3]
1450년(문종 1)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으나 이듬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였고, 고향에 돌아가자 조정의 선비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그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4]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5]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최담 | 최덕지 | A는 B의 어버이이다 |
시간정보
| 시간정보 | 내용 |
|---|---|
| 1384년 | 최덕지가 태어났다 |
| 1405년 | 사관(史官)이 되었다 |
| 1409년 | 오제제문을 준비하지 못하여 투옥되었다 |
| 1450년 | 예문관직제학이 되었다 |
| 1455년 | 최덕지가 사망하였다. |
주석
- ↑ 김용만, "최덕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최덕지",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용만, "최덕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최덕지",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용만, "최덕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