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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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장동룡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7월 12일 (수) 23:41 판 (공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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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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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황산벌싸움
시대 삼국
날짜 의자왕 20년 (660년 07월 09일)
관련장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


정의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때 황산벌(논산시 연산면)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벌어진 싸움.

내용

660년 당의 소정방은 13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산둥반도에서 출발하여 서해안 덕물로를 거쳐 백마강 북쪽에 상륙하였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넘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 : 부여)으로 진격해 왔다. 이에 의자왕은 신라군을 막아내기 위해 계백 장군에게 5천 결사대를 주어 황산벌로 보냈다. 계백은 전쟁터에 나서기 전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을 보이기 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며 처자를 모두 죽이고 출전하였다.
계백은 지대가 높은 험지를 선택하여 부대를 3개의 진으로 나누어 각 진마다 1500명씩 배치하고, 나머지 500명의 병사는 계백의 직할병력으로 남겨두었다. 백제군의 10배가 되는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해 선발대를 3개로 나누어 백제 진영을 공격했으나 죽기를 각오한 백제의 결사대에게 신라군은 4차례나 패하고 상당한 사상자만 내고 물러갔다.
이 때 신라의 장군 김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김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청년 화랑들의 용감한 행동에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고 백제의 결사대는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황산벌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신량리 일대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군영을 세웠던 삼영(三營)은 이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산성 등에 비정되고 있다.[1]

시각자료

사진

영상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계백 황산벌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660년
김유신 황산벌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660년
문무왕 황산벌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660년
관창 황산벌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660년
반굴 황산벌싸움 A은 B에 참가하였다 660년
황산벌 황산벌싸움 A에서 B이 발발하였다 660년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660년 계백은 황산벌싸움에 참가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6.195687 127.180677 황산벌싸움은 황산벌에서 발발하였다

주석

  1. "황산벌 전투와 5천 결사대", 『디지털논산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민족기록화팀(2017년 03월 31일 촬영)
  3. 민족기록화팀(2017년 03월 31일 촬영)
  4. 민족기록화팀(2017년 03월 31일 촬영)
  5. 민족기록화팀(2017년 03월 31일 촬영)
  6. 민족기록화팀(2017년 03월 31일 촬영)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