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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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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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Buddhist Monk Nanghye at Seongjusa Temple Site, Boryeong |
한자 |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
이칭 | 낭혜화상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
주소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5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제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최인연(崔仁渷) |
승려 | 무염(無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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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 통일신라 말의 승려 무염(無染)의 탑비.[1]
내용
개요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문화재청
890년(진성여왕 4) 건립되었다. 무염은 일찍이 당(唐)나라에 갔다가 20여 년 후에 귀국한 후 성주사에 있다가 입적(入寂)하였고, 왕이 시호(諡號)를 낭혜, 탑명을 백월보광으로 내렸다. -두산
성주사지에서 가장 도드라진 유적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다.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지었다.-구석구석
비문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행적이 모두 5천여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는데, 찬자(撰者)는 최치원(崔致遠)이며 글씨는 그의 종제 집사시랑(執事侍郎) 인연(仁兗)이 썼다. 비문에는 건립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낭혜화상이 입적한 2년 뒤에 부도(浮屠)를 쌓았다는 비문으로 보아 이 때 비문이 작성되고 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그 밖의 비문내용을 참고하여 효공왕대 초기에 비문이 작성되고 서자(書者)인 최인연이 909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집사시랑이 된 이후에 비문이 쓰였고 비가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한 이 비문은 신라의 골품과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글씨는 자경 2.5㎝의 해서로 최치원의 필의(筆意)를 지닌 구양통(歐陽通)류에 속한다. 짜임새의 어색한 점 등이 최치원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필획의 크기에 변화를 주어 행서의 필의를 해서에 가미시킨 점은 독특하다.-민백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찬(撰)하고 최인연(崔仁渷 )이 썼으며 자경(字徑)은 1.5cm이다. 신라의 비석 중 최대의 거작으로 혼려(渾麗)한 조각수법은 신라 석비의 대표작품이라 할 만하다. - 두산
탑비
총높이 4.55m, 비신 높이 2.63m, 탑신 너비 1.5m, 두께 0.43m이다. 앞면에는 제액(題額)이 있으나 문자는 마멸되었다. -두산
비신높이 263㎝, 너비 155㎝, 두께 43㎝. 국보 제8호. 전체 높이 4.5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수법을 구사하여 신라시대 석비를 대표할 만하다.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상태로,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螭首), 4면의 운룡문(雲龍文)은 생동감이 넘친다. 이수 앞면 중앙에 마련한 제액(題額)은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민백
10세기 초 세워진 거북 받침돌 위 비석에는 무염대사의 일생과 업적, 성주사를 일으키고 선종을 전파한 내용이 낱낱이 적혔다. 비석의 재료로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글자 하나하나가 큰 훼손 없이 보존되었다. 성주면 일대에서 나는 검은 돌(오석)은 최근에도 귀한 조각상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구석구석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문화재청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문화재청
비문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터에 있다. 탑비의 높이는 251cm, 폭 148cm이며, 글자는 5,120자로 상태가 양호하여 모두 판독이 가능하다. 탑비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국보 제8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주인공 낭혜화상(朗慧和尙)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8대손으로 그의 아버지 범청(範淸)이 김헌창의 반란에 연루되어 진골에서 신분이 득난(得難: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법호는 무염(無染)이며, 800년(애장왕 1)에 출생하여 13세에 출가하였다. 처음에 부석사에서 석징대사(釋澄大師)에게서 화엄학을 배웠고, 821년(헌덕왕 13)에 중국에 유학하여 선승 보철(寶徹)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였다. 중국에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다가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요청으로 성주사(聖住寺)에 머물렀다. 여러 번에 걸쳐 왕명을 받아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문왕 사후에 성주사에 되돌아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에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최치원이며, 비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략 890년(진성여왕 4)에서 얼마 멀지 않은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보인다. 비문에 낭혜화상의 불교 공부 과정이 언급되어 있어 이것은 신라 하대 불교 학풍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낭혜화상이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유교경전 등을 인용하고 있어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도 필수적인 사료이다. 아울러 비문에 신라 골품제와 관련된 결정적인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서 골품제 연구의 핵심 사료로 주목을 받고 있다. -금석문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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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무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인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두산백과』online . - ↑ 김세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보령 성주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두산백과』online . - ↑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