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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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S김지선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6년 12월 27일 (화) 09:19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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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인물정보 김지선

개요

조선 후기 대표적 지리학자이며 지도 제작자. 자는 백원(伯源), 호는 고산자(古山子), 황해도 토산(兎山) 출생으로 본관은 청도(淸道)다. 한자가 다른 김정호(金正皡)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김정호는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1] 무렵에 태어났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잔반(殘班)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2]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김정호와 안면이 있는 한세진의 대인(對人) 증언을 근거로 한다.[3] 반면 동아일보 1925년 10월 9일자 기사에서는 그의 유허(遺墟, 옛 집터)가 남아 있는 남문 밖 약현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대문 밖 공덕리에 살았다는 설은 남대문 밖 공덕리를 잘못 설명한 듯이 보인다. 아무튼 만리재·약현·(남대문 밖) 공덕리는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지에서 살펴보면 서로 가까운 곳에 있다.

동관(童冠)의 나이 때부터 지도와 지지에 관심을 가졌다[4]최한기가 쓴 〈청구도〉 제문(題文)에 나타나 있다. ‘동관’은 18세나 19세로 추정한다.

1834년(순조 34년)에 지지 《동여도지》를 제1차 편찬하였고, 그 부도에 해당하는 지도 〈청구도〉도 펴내었다. 그 뒤 1851년(철종 2년) 무렵에 지지 《여도비지》를 편찬하였고, 1856년(철종 7년) 무렵에는 지도 〈동여도〉를 편찬하였다.

1861년(철종 12년)에는 앞서 만든 〈청구도〉와 〈동여도〉를 보완하여 〈대동여지도〉를 편찬한 뒤 1866년(고종 3년)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궐(補闕)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를 편찬하며 살다가 그해에 남대문 밖 약현에서 폐질환으로 죽었으리라 여겨진다.

김정호의 사상

김정호는 자신에 대한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글은 《지도유설》과 《동여도지》 서문인데, 둘 다 김정호가 쓴 글이다. 다만 《지도유설》은 김정호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듣고 정리하여 쓴 글이며, 《동여도지》만 김정호의 사상을 나타낸 글이다. 《동여도지》에 나타난 김정호의 사상이나 역사지리 인식은 다음과 같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誌)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인식하였다. 지도로써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지로써 역대의 제도와 문물을 헤아려 볼 수 있으므로 지도와 지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위국(爲國) 곧 치국(治國)의 대경(大經)이라고 지도와 지지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지도와 지지가 위와 같이 중요함에도 단기(檀箕; 단군기자) 이래로 지도가 없고 지지는 《삼국사기》에 이르러 비로소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지의 첫머리에 신라 이전의 사항을 두어 알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는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어 비로소 도적(圖籍)이 환연해졌지만, 김정호가 사는 때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편찬된 지 3백여 년이 지나 지리 정보에 차이가 많아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으려고 《동여도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편목이나 구성이 《동국여지승람》의 구성과 비슷하다.

김정호는 또한 지도와 지지의 제작이 치국의 대경이라는 자신의 주장대로 치국경제에 유용하도록 《동여도지》 등을 제작할 때 문교무비(文敎武備)에 해당하는 관방과 역참, 학교와 서원 등 42개 편목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표기하였다.

김정호와 관련한 오해

김정호의 전국 답사설

틀:위키문헌 김정호의 대작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이다. 김정호는 조선의 지리를 연구하고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직접 조선 전역을 답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5] 일부 학자들은 김정호가 직접 탐사하여 지도를 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고[6][7] 김정호가 해당 지역의 관찬 지도와 '가장지도'(家藏地圖)를 참고하였음을 근거로 들었다. 가장지도란 각 지역 유력 집안에서 사사로이 만든 지도로, 대체로 그들 소유의 임야나 농경지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 정확성은 관찬 지도에 못지않았다.[7]

또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서 “(김정호가) 여지학(지리학)을 좋아하여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8] 라는 구절은 답사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상기·최한기·신헌 등도 전국을 답사하지 않고 기존의 지도를 두루 모아 집대성했음을 밝히고 있다.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인 당빌 역시 프랑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당시로는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든 것과 비슷한 예다.

애초에 국가 단위의 지도를 개인이 오로지 답사에만 의존해 제작했단 자체가 넌센스이며, 과거 민족사관에 힘입어 부각되고 조명된 여러 역사인물들이 그러했듯 민족적 긍지를 드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김정호 역시 백두산을 수차례 오르고 전국을 낱낱이 답사해 지도를 만들었단 식으로 다소 과장되고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제작자가 서로 다른 수많은 지역도를 모아 집대성한 것만으로 그만한 정확도를 갖추긴 어려웠을 것이고 이전 지도보다 개선되었음을 감안할 때, 일관성 있는 편집 및 검증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의 면밀한 답사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김정호 옥사설

김정호는 1866년경에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 흥선대원군이 김정호를 이적행위자로 몰아 옥사시켰다는 주장이 있으나,[5][9] 이는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의 엘리트 역사학자들이 흥선대원군을 새로운 문물 흡수를 거부하는 폐쇄적인 인물로 인식시키고, 한민족에게 훌륭한 인물을 스스로 죽였다는 거짓 역사관을 가르쳐주기 위해 알려준 역사라는 주장도 있다.[6]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는 '흥선 대원군은 완성된 지도가 외국에 알려질 경우를 두려워하여 수십 년 고생하여 만든 목판을 불태워 버리고 김정호와 그의 딸을 함께 옥사시켰다'고 기술하였다.[10]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신헌 등이 김정호의 오랜 지기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그들이 벌을 받지 않았음이 밝혀져 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11]

더구나 김정호가 만든 지도나 펴낸 지지가 손상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 있고(일부는 멸실되었다),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다는 지도의 판목이 남아 있으며[6][12][13], 그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후원자였던 신헌은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도 죄인이 수록되지는 않았으리라 보이며, 김정호의 죽음을 '몰'(沒; 죽다)로 표현하고 물고(物故; 죄인이 벌을 받아 죽다) 등으로 적시하진 않았다.[6] 또한 《고종실록》·《승정원일기》·《추국안》 등의 사료에도 김정호가 투옥된 기록은 없다.[13] 게다가 최근 연구에서 신헌 등이 비변사규장각의 지도를 김정호에게 제공한 것으로 추측되는지라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사실상 조선 정부에서 지원했다는 주장도 있다.[6]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중간설

한때 〈지구전후도〉 중간자가 김정호라는 설이 퍼졌다. 이에 따라 태연재(泰然齋)가 김정호의 당호라는 설도 퍼졌다. 그러나 나중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지구도변증설(地球圖辨證說)에서는 〈지구전후도〉 중간자를 최한기라고 적고 있음이 밝혀졌다.


저서(작품)

지도와 지리지

대동여지도

김정호가 편찬한 지도와 지리지는 다음과 같다.

위에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와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를 ‘김정호의 3대 지도와 3대 지지’라고도 부른다.

상훈과 추모

일제강점기인 1925년 10월 8일과 9일 2번에 걸친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懷)함」이란 글에서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통해 민족적 우수성을 되짚어보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이 나타났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호가 국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측량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점을 부각시켜 1800년(순조 즉위) 초반에 에도막부[江戶幕府]의 도움을 받아 전국을 답사하면서 일본을 측량하여 지도를 제작한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내세우려 하였다.

둘째, 근대식 측량지도 못지않은 정확한 지도가 조선에도 『대동여지도』란 이름으로 제작되었음을 부각시켜 민족적 우수함을 설명함으로써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 백성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였다. 셋째, 관에 의한 판목몰수설을 통해 조선의 멸망을 백성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집권층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 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김정호의 전기가 처음으로 수록되었는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판목몰수설은 『동아일보』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그대로 따왔다.

다만 첫째,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우수함을 부각시키려 비교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노 다다타카와 그가 제작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였다. 둘째, 김정호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조선의 지도가 정확성에서 엉터리라는 이야기를 삽입시킴으로써 김정호 이전 조선의 지도 제작 능력을 폄하시켰다. 셋째, 흥선대원군이란 구체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개항기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부각시킴으로써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편입된 것을 정당화시키려 하였다. 넷째, 조선 정부의 무능력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김정호 부녀의 옥사설을 추가하였다.

판목소각설은 『동아일보』의 기사나 『조선어독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로, 후대의 다른 자료에서 첨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김정호의 전기는 1980년대까지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1990년대부터 전국답사설·백두산등정설·옥사설·판목소각설이 모두 잘못된 이야기라는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 점점 교정되기 시작했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관한 네 가지 설은 첫째, 전통시대에 필요한 거리 정보의 종류와 그것에 기초를 둔 지도의 제작 과정을 모르는 비전문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둘째, 김정호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던 조선의 지도와 지리지 제작의 변천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셋째, 김정호가 국토정보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넷째, 김정호가 지도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맞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이용의 편리였다는 점을 몰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잘못된 주장이다.


평가

유학자로서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1572년(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1581년(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1589∼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 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금산 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기타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최대섭의 1979년 민족기록화 작품 최대섭-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약을 비롯한 무기 연구 및 제조에 힘썼으며, 우리나라 무기제조사와 전쟁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향견문록에서의 김정호

노드 및 관계

노드 관계 노드 설명
김정호 isTheSubjectOf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김태-김정호의 대동여지도김정호를 소재로 그려진 민족기록화이다.
김정호 creates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김정호 isMentionedIn 이향견문록 이향견문록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김정호 isMentionedIn 청구도제 청구도제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김정호 isMentionedIn 금당초고 금당초고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김정호 creates 청구도 청구도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기록이다.
김정호 isMentionedIn 오주연문장전상고 오주연문장전상고김정호가 언급된 기록이다.
김정호 hasFriendshipWith 최한기 최한기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김정호 hasFriendshipWith 김정희 김정희김정호와 친분관계가 있는 인물이다.

함께 보기

  • 최한기
  • 신헌
  • 청구도
  • 대동여지도
  • 대동지지
  • 지도박물관
  • 95016 김정호 -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소행성의 이름에 김정호를 따서 지었다.
  • 고산자로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의 옛 청량리 부근.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었다.
  • 《고산자, 대동여지도》 - 영화, 2016.09.07 개봉, 감독:강우석, 출연:차승원, 유준상

참고문헌

각주

  1. 김양선(金良善)의 주장.
  2. 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청도 김씨 봉산파는 현재 한국 전쟁으로 실계(失系; 가계가 끊김)되었으며,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에도 김정호는 실려 있지 않다. 이를 근거로 김정호의 집안이 청도 김씨 봉산파이기는 하나 매우 한미한 집안이었음을 추측된다.
  3. 정인보(鄭寅普), 〈대동여지도〉, 《창원국학산고》 제2편 조선고서해제; 동아일보 1931년 3월 9일자와 16일자.
  4. 원문은 “金友正浩 年自童冠 深留意圖志”이다.
  5. 5.0 5.1 글로벌세계대백과》, 〈실학의 융성〉, 김정호.
  6. 6.0 6.1 6.2 6.3 6.4 소준섭. 《조선인물실록 1》, 256~264쪽.
  7. 7.0 7.1 틀:서적 인용
  8. 유재건, 《이향견문록》, “癖於輿地之學 博攷廣蒐”.
  9.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제5권 4과.
  10. 역사를 새로 쓰게 한 발견 - 대동여지도 목판, 문화유산채널
  11. 또한 흥선대원군은 애로호 전쟁이나 두 차례의 강화도 군사분쟁 등 서구 열강의 쇄도가 동양을 죄어오는 문제에 대해서 경계를 하기는 했지만,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을 통해 서양의 회중시계를 구해오게 하여 그것으로 시간을 맞추며 알뜰히 썼던 일이나, 대동강에서 통상을 강요하면서 횡포를 부리다가 소각된 제너럴 셔먼호의 잔해를 수습하여 연구하라 명령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문물 흡수에 적극성을 갖고 있었다.
  12. 〈대동여지도〉 등을 연구했던 김양선도 그 판목을 소유하였고, 국립중앙박물관에도 판목이 15매 남아 있다.
  13. 13.0 13.1 틀: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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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자료